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꿈을 잘 꿨다. '잘'꾼다는 게 어떤 거냐면 자주도 꾸지만 꿈속 상황이 너무 선명해서 꿈꾸다 넘어지고 울고 웃고 잠꼬대하며 깬 적이 많다. 심지어 희한한 배경 속을 헤매다 낭떠러지에 이르면 '그냥 꿈이니까 뛰어내리자'라고 생각하며 뛰어내리기도 하고, 진짜 설레고 행복한 상황이 다가오면 '아무래도 이거 꿈인 거 같은데.. 안 깨고 싶다'는 생각이 꿈속에서도 은연중에 든다. 이쯤 되면 자각몽(lucid dream) 중에 어느 정도 꿈을 통제하는 수준인데.. 참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하나 있다.
서른이 지나고 애들 키우며 수년간 반복되는 꿈이 하나 있는데, 너무 오래반복해서 꾸다 보니 꿈을 깨서도 몇 분 동안은 현실과 헷갈릴 지경이다.
무슨 꿈인고 하니, 다시 고등학교에 모여서 대입을 준비해야 하는 꿈이다. 생각지도 못한, 기억하지도 못했던 고교 동창들이 출연하고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수능을 준비한다. 주로 성실했던 친구들이 등장한다. 난 분명 대학 졸업장이 있는 것 같은데.. 또다시 하라니 너무 답답하고 자신이 없다. 내면에 깔린 솔직한 심정은.. 다시 시험 쳐서 더 좋은 학교에 갈 자신이 없는 것이다. 나는 실력이 안되는데 운이 억세게 좋아(별것도 없지만) 이 모든 것을 이뤄 놓은 것 같은 심리가 있는 것이다.
어제 읽은 「좋아하는일을끝까지해보고싶습니다」 에 '사기꾼증후군' 에 대한 설명이 나왔는데, 그거랑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본다. 자신이 능력 이상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생각해서 언제 들통날까 걱정하는 심리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그 꿈에 항상 나오는 것이 '다 풀지 못한 수학 문제집'이다. 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난 항상 문제집을 다 풀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똥줄이 탄다. 아마 고 1 때 수학의 정석에서 인수분해가 나오던 시점부터 수학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반쯤 포기했었는데.. 그게 알게 모르게 죄책감, 후회, 아쉬움 같은 형태로 아직 남아있나 보다. 거의 트라우마 수준이다. (재수할 때 수학 열심히 해서 다행히 수학 덕에 대학에 갔다)
하튼 내 깊은 심연에서 밤마다 꿈에 나와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번역도 아닌 '수학 문제집'이라니? 참 아이러니하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이 답답한 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제는 약 10년 전에 혼자 좋아했던 사람이 꿈에 나왔다(갑분 짝사랑). 어찌나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내게서 멀어지던지ㅋㅋ 서글퍼서 눈물이 날만큼 생생했다. 오래 전 그때, 상대방이 날 봐주지 않을 때, 너무 한숨만 내쉬지 말고 나 자신의 감정을 잘 보듬어줄 걸 그랬다.
기억에서 다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관심도 없고 신경도 안 쓰는데 (사실이 그렇다)
내 감정이 지나온 흔적들을 꿈이 모두 다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참 신기하다. 그리고 그게 싫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