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제품과 헤어져 보기
사실 나는 덕후라고 부르기엔 한참 모자라지만 일본제품을 좋아하고 반감도 없는 사람이었다. 게임도 좋아하지 않아서 게임기를 사지도 않았고 오디오기기도 다른 좋은 제품들이 많아서 일본제품을 많이 사진 않았지만 일본여행과 음식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일본여행에 대해 비슷하게 느끼겠지만 비교적 가까운 곳임에도 비행기타고 여행가는 느낌도 있고 음식도 한국사람 입맛에 잘 맞아서 도쿄에 출장도 몇번 갔고 오래전이지만 초밥을 좋아하는 부모님을 모시고 오키나와랑 후쿠오카를 여행한 적도 있다.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때도 일본과 적잖이 거래가 있다보니 일본에 대해 큰 반감은 없었다. 그런데 뭐랄까 내가 꼰대가 되어 가는 과정인지 실리보다는 명분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경우가 더러 생기곤 한다. 마음에 들고 좋으면 그만이지 세계화 시대에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가, 나 하나 안쓴다고 크게 달라지지도 않을텐데 라며 그렇게 나 스스로에게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가며 일본제품을 꾸역꾸역 써왔다. 태평양 건너 미국에 온 후로도 수년이 지났지만 쉽게 손떼지 못하는게 바로 일본제품이었다. 사실 미국에서는 한국에서보다 더 많은 선택지가 있지만 소비를 하면서 소위 '가성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어서 일본제품들이 항상 후보군에 올라가곤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자동차, 일본전자제품 등이 소위 수입품으로 분류되어 고가품 또는 고급차종으로 인식되는데 미국에서는 워낙 많은 세계 각지의 제품들이 경쟁하다보니 일본제품은 품질 괜찮고 가격도 착한 보급형 컨셉으로, 일부 럭셔리 모델들이 고급형으로 포지셔닝이 되어있다. 가장 좋은 예가 일본자동차인데 미국에 굴러다니는 가장 많은 차량이 토요타 캠리와 혼다 어코드로 렉서스나 인피니티 같은 고급라인도 있지만 대개 가족차량을 구입할때 후보군에 오르는 자동차 브랜드들이다.
내가 처음 미국에 왔을때 너무 서둘러 차를 사지말고 차가 꼭 필요할 때 까지 뚜벅이로 살면서 좋은 차량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아내와 합의했고 그렇게 반년쯤 대중교통과 간간히 차량공유서비스나 렌터카를 이용해서 장보러도 다니고 여행도 다녔다. 장보러 갈때는 차없이 다니는게 특히 불편했는데 가끔 근처의 자동차딜러를 찾아가서 좋은 중고차가 있는지 둘러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번번히 부담스러운 가격이 발목을 잡았다. 추수감사절을 1-2주 앞둔 어느 날 우연히 들렀던 렉서스 딜러샵에서 한국인 딜러 Andrew를 만났는데 연식은 2년쯤 지났지만 주행거리가 6,000 마일 밖에 안되는 차량을 발견했다. 사고내역도 없었고 외관도 잘 관리되어 있었지만 적은 마일리지를 보니 아마도 고객의 차량을 수리하는 동안 대차로 빌려주는 Loaner car였거나 연말을 맞아 '밀어내기'로 급처분하려는 건지 시세보다 조금 낮은 가격에 판매하는걸 보고 시운전을 해보고 며칠만 더 생각해 보겠다고 한번 튕겼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는 누가 채갈까 두려워 다음날 얼른 가서 차를 구입해왔다. 보통의 미국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사람들의 일본 자동차 선호는 압도적이다. 내구성이 좋고 잔고장이 적어서 특별히 속썩이지 않으면서 타기 부담없고 딜러십이 잘 구축되어 있어 차량수리가 필요할때도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수리비용도 착한 편이다. 가격도 내가 미국에 온 2015년 쯤에는 2만불 중반이면 토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 기본옵션 정도를 살수 있으니 자금이 넉넉치 않은 사람에게 일본자동차는 꽤 합리적인 옵션으로 보였다.
이런 내 일제사랑을 멈추게 해준건 의외로 일제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에서의 일본제품 취급경험이 큰 역할을 해서 일본회사의 미국지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사실 대부분 간접적으로 접하기만 했지 직접 일본회사의 조직안에서 일해본 적은 처음이었다. 근데 일본제품들에서 느낄수 있듯 굉장히 변태적으로 꼼꼼하고 완벽할거라고 예상했던 일본회사는 의외로 내가 가진 환상과는 달리 그저그런 평범한, 하지만 시장을 선점한 덕분에 축적된 경험이 제법 많은 회사였다. 좋게 바라보면 정해진 원칙안에서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조직이지만 안좋게 보면 유연성이 없는 고리타분한 쌍팔년식 조직이었다는 사실을 5년 정도 근무해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다. 그렇게 뭘해도 한없이 좋게만 보이던 일본제품들의 거품을 걷어내보니 가성비가 괜찮은 제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거기에 조금의 부담(?)을 더하면 충분히 더 좋은 브랜드도 경험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로 일본차에서 해방되어야 겠다고 마음먹고 시간날때마다 다양한 딜러십을 찾아가서 시승을 하고 어떤 차량이 내 방식에 맞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역시 문제는 그 조금의 부담(?)이었다. 차값 5천불 또는 1만불 차이는 생각보다 크게 체감되는 금액이었고 고급브랜드일수록 할인에 인색한 편이라 내 맘에 맞는 가격대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애물단지인 렉서스를 타고 다니던 어느 날, 건너건너 아는 분이 M사에 근무하시는데 마침 프로모션 쿠폰이 남아서 차량을 구매할거라면 보내주겠다는 제안에 계획에도 없던 최고급 모델을 살펴보기 시작했고 살면서 또 언제 이런 고급차를 타게될 지 기약도 없으니 상위모델에 좋은 옵션을 많이 넣어서 견적을 뽑아보니 꽤 높은 가격이었지만 12% 정도 할인에 지금 타고 있는 차를 Trade-in을 하면 부담할 금액이 생각보다 크지 않아서 덜컥 계약을 해버렸다. 일본차를 처분하고 독일차를 타게 된게 2년이 좀 넘었지만 버려야지 하고 생각만 하면서 그저 계속 사용하다보니 무디어진 내 맘속의 찜찜함을 그제야 털어버릴수 있게 됐다. 그렇게 꽤 큰돈을 쓰고서야 부피가 제일 큰 일본제품 하나와 이별할 수 있었다.
휴~ 차량할부는 미래의 내가 갚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