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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조금 어려운 의미들

지은이도 이토록 솔직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by 유진

지은이도 이토록 솔직하니, 나도 솔직하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만약 이 책의 지은이와 내가 지인이었다면, 우린 친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모임으로 엮였다면,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짜 이후로는 재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왜 이리 선을 긋느냐고? 그냥, 작가와 나는 결이 많이 달랐다. 어떤 문제를 마주했을 때의 해결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에 놓였을 때의 태도도, 솔직함의 방식도, 문장 구성도, 말하고자 하는 바도, 사고방식도 나와는 반대편에 있는 듯했다.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책일 텐데, 하필 나라는 사람 앞에 놓이는 바람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 책의 시작과 끝이 ‘친해질 수 없는 사람’과의 어쩔 수 없는 만남처럼 느껴졌다. 즐겨 보지 않는 독립영화의 대사집을 보는 것 같았다. 내 교양 수준으로는 읽기 벅찬 전시회의 안내문을 보는 듯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흐름 자체가 맞지 않았다. 예술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혼란과 파편을 감상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지만, 그가 회고하는 시점들의 이야기가 다소 성급하게 다가왔다. 아직 우리는 라포(사람과 사람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는데, 그의 히스토리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궁금하지도 않은 정보들이 마구 흘러들어왔다.


그래서 읽는 내내 당혹감이 가득했다. 왜 책들을 읽으며 병원 생활을 버텼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당장 내 현실 앞에 해야 할 일이 가득한데, 너무 낯선 타인의 깊숙한 내면은 오히려 큰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문장에서도 우리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아마 이 지점은 내가 글을 쓰게 되면서 더욱 예민하게 느끼게 된 부분일 것이다. 피하고 싶은 형태의 문장들이 이곳에 만연했다. 매일 초고를 마주하며 직면하는, 유달리 자주 등장하고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단어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나열되어 있었다.


나는 그보다 훨씬 친절한 문장을 만나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늘 빼고 싶어 하던 단어들이 이곳에 속속들이 박혀 있어 당황했다.


그는 매우 솔직한 사람이었다.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픔을 겪던 시점의 생각을 밝히는 데 있어서도, 문장을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의료진들이 자신을 어떻게 제단했는지도, 또 자신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내 바로 앞에서 눈을 부릅뜨고, 숨도 쉬지 않은 채 단어와 단어를 내뱉는데, 그 기세에 눌려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료진과의 치료 장면에서도 꽤 확정적인 말들이 많았다. 그 표현들이 사실 내게는 거슬리는 포인트였다. 내가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공개하면 늘 따라오는 질문이 하나 있다. “어, 제 심리 맞춰보세요.” 지금 다시 봐도 황당한 질문이지만, 아마 ‘심리학과니까’ 가벼운 재미로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프로페셔널하게 대답하곤 했다. “저 사이비예요. 아무것도 몰라요.”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배운 게 뭐였더라. 지금 생각나는 것을 나열해보자.


어떤 사람도, 환경도, 문제도 단편적으로 판단하지 말 것.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사실이 정말 진실인지, 늘 물음표를 띄우며 의심할 것.


심리 측정 도구란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연구하며 개진해 만들어낸 결과물 중 하나라는 것.


심리 상담이란 상담자에게 의지해 문제를 이겨내는 일이 아니라, 내담자가 자신의 두 다리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라는 것.


딱, 이 정도겠다.


이 말밖에는, 도저히 쉽게 내뱉을 수가 없다. 그 안에 아주 깊은 도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리학 용어 하나를 사용하는 데에도, 작가가 자주 말한 ‘낙인’이라는 것이 있어서 단어는 입 안에서 맴돌다 끝내 멈춰버린다. 스스로가 매우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의 표현은 너무 거침없었다. 그래서 한 발 더 멀어졌다. 이미 다 정해놓은 태도로 서술하는 그 기세 또한, 나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책을 읽기로 한 이상 작가의 편에 서서 그의 시점을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저들은 편협한 진단 체계로 나라는 사람의 개성을 완전히 무시했다!”며 모든 것을 단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그를 멀찍이서 바라보게 되었다.


물론 번역서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단지 나와 애초부터 다른 사람이라 이런 마음들이 얹혔던 것 같다. 속이 시원한 직설적인 문장들, 스스로의 욕망을 드러내는 방식, 형용하기 어려운 마음을 묘사하는 낯선 단어들이 다채롭게 이어졌다. 어떻게든 이해해보려, 그의 사유에 닿아보려 애썼지만 결론은 같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지금, 그가 잘 살고 있길 바라면서도 책이란 건 —글이란 건— 결국 취향을 많이 타는 어려운 존재임을 다시 느꼈다. 나의 이해 부족을 원망하며, 조용히 그를 보내 주었다. 내겐 조금 어려운 의미들이었다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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