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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고백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흐른단다

천장 아래, 가장 반짝이는 소리를 따라_ 피아니스트 백혜선

by 유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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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클래식 공연만큼 좌석이 중요하지 않은 공연이 또 있을까 싶다. 당신이 이 고전을 향유하러 공연장에 발을 들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좋아하는 연주가를 보기 위함인가? 그렇다면 좌석은 꽤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들이 펼쳐내는 합을 지켜보기 위해서라면 무대와 가까울수록 좋겠지.


그러나 만약 당신이 어떤 ‘연주’를 감상하기 위해, 특정 작곡가의 곡을 실연으로 듣기 위함이라면 좌석과 시야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왜냐고? 우리가 감상해야 하는 실질적 존재는 무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장을 자신 있게 말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하나 필요하다.


연주가가 연주를 잘해야 한다는 것. 그러면 정말 좌석은—천장과 맞닿을 듯한 자리라 해도—크게 중요하지 않다. 연주가가 소리를 천장까지 직선주로로 날려주고, 사방으로 피워내는 연주를 들려준다면 말이다.


나와 완전히 다른 거리감에서 피어나는 작품을 지켜보는 맛이 있지 않은가? 미술관에서도 일정 거리 이상 다가가지 말라고 선을 그어두지 않던가. 작품과 나 사이의 거리가 멀어도 전해질 마음은 다 전해진다. 의도만 분명하다면.


갑자기 왜 ‘좌석 안 중요해’ 이론을 펼치나 싶겠다. 아주 안 좋은 자리에서 최고의 공연을 목도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이 생각을 건져 올린 11월 11일, 나는 좋은 조건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1층 중블 중간이면 상당히 훌륭한 시야를 제공해주는 자리 아닌가.


그런데도 내가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 날, 11일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나는 무대를 5분 이상 바라보지 않았다. 응시해야 할 것들은 그곳에 없었다. 나보다 훨씬 높은 곳에 떠 있었다.


자, 이 글을 읽는 당신. 검지손가락 하나만 남겨놓은, 어딘가를 ‘콕’ 찍는 손 모양을 만들어 천장을 향해 팔을 쭉 뻗어보시라. 뻗었는가? 그래, 딱 거기다. 내가 한 시간 넘게 응시한 대상은 그정도 시야에 있었다. 그만큼의 길이와 그만큼의 높이에 무엇이 있었나? 백혜선 피아니스트의 반짝이는 물방울들이 머물러 있었다.


신기했다. 소리가 작곡가보다 더 커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베토벤, 서주리, 버르토크, 슈만 모두 저 손 아래에 얌전히, 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떻게 지금 음표에서 다음 음표로 넘어가는 그 ‘꺾임’의 모양새가 이토록 부드러울 수 있지? 기교를 더 부릴 줄 알면서도, 연주하는 작곡가의 개성을 살릴 만큼만 노래하고 표현해낸다는 것이 가능한가. 그 절제를 다뤄낼 줄 아는 것이 바로 프로인 건가?


피아노가 왼손과 오른손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악기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다. 물방울을 저렇게 얇고 높게 띄울 수도 있구나.


내 시선 안의 백혜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서 가장 바르고 곧게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우아한 여름비와 개운한 가을비를 닮은 맑음이었다. 공연이 시작되자, 연주가는 본인이 하고 있는 귀걸이보다 훨씬 더 반짝이는 소리들을 오래도록 들려주기 시작했다.




연주 직전, 백혜선 피아니스트는 올해가 광복 8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주년이라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런 시간을 떠올리다 보니 자연스레 ‘고향’이라는 감정에 닿게 되었고, 그래서 오늘의 프로그램도 그 흐름으로 묶어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먼저 베토벤 소나타 26번에 대해 설명했다. 이 곡은 베토벤의 후원자가 비엔나 침략으로 인해 떠나게 되면서 탄생한 작품이며, 그 이별의 감정이 고스란히 ‘고별’ 소나타에 담겨 있다고 했다. 1악장은 쫓기듯 슬프고, 2악장은 공허하며, 3악장은 재회의 기쁨으로 이어진다. 이 소나타가 당시부터 제목이 붙어 있던 거의 유일한 작품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이어 소개된 곡은 서주리의 피아노 소나타였다. 작곡가는 계절과 기억을 서사처럼 엮었고, 4악장에는 ‘고향의 봄’ 선율이 스며 있다고 했다. 봄비, 여름 소나기, 가을의 야상곡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짜였다.


버르토크의 경우, 헝가리 고유의 민족 리듬이 우리의 정서와도 닮아 있다고 했다. 2악장은 명상적인 목탁 소리 같고, 3악장은 한판 춤이 벌어지는 듯한 활기를 품고 있다고.


마지막은 슈만의 ‘환상곡’. 베토벤 동상 건립을 위해 쓰였지만, 슈만의 진짜 마음의 고향인 부인 클라라를 향한 마음이 악장 곳곳에 녹아 있다고 피아니스트는 말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6번 “Les Adieux” (고별)


이별은 누구도 피할 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먼저 스쳤다. 통나무의 기색을 닮은 물방울들이 천천히 나열되는 풍경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신이 난 사람처럼 도망가버리는 모습을 본다. 어디로 가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천진해서 붙잡을 재간이 없다.


잠깐 멈추기도 하지만 빈틈은 없다. 하얀 소리들로 제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가려내버리는 걸까. 윤이 바스라진 형태로 사방에 흩뿌려진다. 이별 앞에서 정신이 하나도 없는 걸까.


신나 보이는 표정이 묘하게 마음을 건드린다. 떠나는 이를 응원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시 재회할 것을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이 깃든 건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그렇게까지 공허하지는 않아 보인다.


담대하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처럼 제자리를 묵묵히 지켜내는데 고독하지 않다. 베토벤보다 더 큰 어른이 두 손 안에서 물방울을 아주 높고 얇게 띄워낸다. 저기까지 닿을 수 있구나.


베토벤이나 모차르트의 곡은 듣다 보면 일정한 규칙의 박자로 ‘당–당–당–당’ 단단하고 청량하게 음표를 내려놓는 순간이 꼭 있다. 꽤 매력적이면서도 참 그들다운 지점이다. 우르릉쾅쾅은 아닌데, 오로로로— 입으로 장난치는 아이처럼 깨발랄하게 뛰노는 느낌이 귀엽다.


연주가들은 이런 포인트들을 어떻게 일관적으로 표현해내는 거지? 결국 다 베토벤처럼 쳐야 하는 것 아닌가? …혹시 연기까지 배워야 합니까?



서주리 피아노 소나타 2번 “La Primavera”


애달픈 봄이려나? 참 맑다. 바쁜 춤을 추는 잎파리들일까? 분홍색인 것 같은데, 약간 톤다운되어 있지만 생기는 가득하다. 빗방울이 땅 위로 걱정 없이 뛰어드는구나. 망설임이라곤 하나도 없다. 저렇게 재미나게 살아도 좋을 텐데.


재즈 스캣 같기도 한 계절이 온다. 폭발력도 상당해. 막 지하 땅굴을 파버리는 것 같달까. 천둥이 내려꽂힌 건가. 음이 사라져가는 길도 일직선이네.


가을의 윤기이려나. 샛노랗게 물든 계절 사이에서 피어난 소리라 더 마음에 새겨진다. 추운 계절이기도 하다. 오늘의 바람결이 보석이 되어버렸다. 함부로 내디디지 못할 발걸음도 있다. 눈물보다 가벼운 형태지만, 그 안에 깃든 정성은 참 무겁다. 내가 생각한 ‘고별’의 기운이 이 계절에 가득하다.


눈이 내린다. 솔솔 내려온다. 니트 장갑을 낀 작은 손들이 쌓여오는 것들 사이에서 짝–짝 박수를 칠 것이다. 빨강 하나, 초록 하나, 하양 하나, 파랑 두 개. 사이가 워낙 좋은지 눈싸움은 안 한다. 눈결정을 가지고 놀기에도 바쁜가 보다. 하긴, 나라도 기분 좋아하기 바쁘겠다.


베토벤을 지나 서주리를 만나고 난 뒤 듣는 ‘고향의 봄’은, 좋아하는 사람의 떠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오른손을 흔들어주는 사람 같다. 방긋방긋 웃어주다가 금세 입꼬리가 저물어드는 사람. 저만큼 그 옆에 다가서고 싶지만, 감히 뒤따를 수 없는 사람의 발끝 같다.


점점 멀어지는 종이컵 전화기의 길고 가느다란 실로 우리는 작별했다. 안녕의 계절인가봐요.



버르토크 피아노 소나타 Sz.80


그래도 버르토크는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서두에 비하면 양반이다. 체계적으로 둔탁하지 않은가? 다정하게 어려운 일을 한다니까? 이쯤 되면 헝가리의 민속적 리듬은 어떤 모습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박치는 살아남을 수 없는 어둑한 리드미컬함이 있다. 도대체 이걸 왜 듣나 싶은데, 진짜 희한하게도 가끔 생각날 때가 있다. 버며든 건가… 소리가 제자리에서 계속 쉼 없이 뛰어다니는데 귀로 듣는 파괴적인 현대무용 같달까.


왜 저기까지 뒤로 갔을까? 갑자기 혼자 고개를 들어 올리고, 손을 막 위로 번쩍 들더니, 무서운 모양이 되어버린다니까? 불구덩이 위에서 추는 춤 같기도 하다. 두드리네. 어디에 신호를 보내려고 하는 걸까. 전할 말이 있나.


갑자기 차분해지기도 한다. 혹시 우나? 싶어 떨군 고개 아래의 얼굴 표정을 읽어보려 하지만, 쉽사리 품을 내어주지 않는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데 감추는 게 많아서, 어떡하나 싶다. 애먼 유리창만 때리지 말고…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어, 갑자기 말문이 터졌다. 그렇다고 아우성치라는 건 아니다. 다만 입만 바쁜 게 아니라 발짓까지 더 빨라졌다. 그래도 아까보단 좀 나아 보인다. 작은 관심 덕분일까? 뒤뚱거리는데도 신이 엄청 났다. 그냥 인사치레로 건넨 말 한마디였을 뿐인데. 쉴 틈이 없다.


진짜— 버르토크를 모르는 사람은 이 곡을 들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아예 모르는 타인의 무지갯빛 환상 안에 붙잡혀버린 극T 인간의 심정을 서술하라 말하면, 이 마지막 악장을 들려주면 될 것 같다. 어렵다, 어려워! (근데 난 좋아)



슈만 환상곡 C장조, Op.17


슈만은 넓다란 꽃을 작은 것에서 커다란 마음으로 피워내줘서 좋다. 말린 장미색, 이쁘지 않은가? 그의 곡을 들으면 단순히 붉은색 하나로는 곡의 색감이 다 전해지지 않는다.


조금 더 앳되기도 하면서, 진득한 열정이 깃들어 있지만 우아하고, 펼쳐내는 서사를 닮아있어야 한다. 어느 정도는 순수하면서 대체로는 낭만적인, 그 사랑을 담아낼 수 있는 색채가 무엇이 있겠나. 톤다운된 짙은 분홍색이다.


약간의 슬픔도 깃들어 있으면 좋겠다. 가만히 있어도 생각만 해도 애달파지는 순간을 묘사해야 하지 않겠나. 조금씩 자라날 줄도 알아야 한다.


슈만은 높지 않은 곳에서도 씩씩할 수 있구나. 백혜선 피아니스트의 손 아래에 그가 놓이니 전해지는 마음들이 열정적이지만 정제되어 있다. 할 말이 있으면 꼭 해내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여기 있다.


와— 천장을 바라보며 소리를 왼쪽 눈으로 하나, 오른쪽 눈으로 둘. 담고 있었는데, 신기한 소리가 들렸다. 어느 손인지 모르겠지만 한 손은 종소리가 되고, 한 손은 꽃결을 닮은 안개가 되어 있다. 슈만은 꽤 재밌는 사람인가봐. 주저하려는 내색 자체가 없네. 사랑이 뭐라고! 순정이 느끼하지 않고 농밀하게 표현될 수 있구나.


향기로움을 음에 태워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재능일까? 드러내려는 마음이 되게 강하고 멈춤이 없는데,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마 이 곡이 향하는 방향이 한 사람의 마음 안이기 때문일까?


굳이, 굳이 작게 말할 수도 있지만, 이만큼 너를 그리고 있음을 굳이, 굳이 거대한 선율로 담아낼 수 있는 사람이 슈만일까? 그렇다면 부러워진다. 누가? 클라라? 아니다. 이만큼 솔직하게 마음을 높일 수 있는 슈만이.


솔직하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이만큼이나 신나게 뜀박질할 수 있는 것이다. 얼마나 속 시원하겠는가?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는데!


막 뒤로 내려오기도 한다. 옆으로 막— 귀여운 스텝도 밟는다. (얼씨구) 특유의 재미나고 장중한 리듬이 있다. 아— 이건 들어보셔야 하는데.


피아노가 까랑거리며 걷기도 한다는 걸 아시는가? 능숙한 피아니스트의 손 아래 놓이면, 그는 재간둥이가 되어버린다. 능청쟁이가 되기도 한다.


어머, 이미 클라라 꼬셨나 봄. 그렇지 않고서야 타건이 이렇게 결혼행진곡 같을 수 없다. 아까 그 재미난 것들도 돌아왔다. 식 끝나고 뒷풀이 파티하는 줄. 폭죽이 되었나 보다.


진짜 화려하고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는 어여쁜 소리들이다. 뭐야— 왈츠 타임도 있다. 손을 맞잡고 걷는 연인이 여기 있으니, 우리는 가만 지켜볼 수밖에 없다. 땅보단 하늘에 가까운 위치에서 한들—한들한 컨페티들이 퐁퐁— 날아다닌다. 왼손과 오른손이 계속 대화를 나눈다.


어쩜 소리가 피아노 위에서 한 치의 부끄럼 없이 저렇게 서 있을 수 있지? 이 악기 앞에서 단 한 번도 비스듬하게 서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맞나봐.


늘— 바른 자세로, 꼿꼿하게 선 사람이 저기 있네. 음— 이런 연주가구나. 이런 사람이구나. 이 순간만큼은 슈만보다 더 거대한 사람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앙코르 — 슈만/리스트 <미르테> ‘헌정’

그대는 나의 영혼, 그대는 나의 심장.
그대는 나의 기쁨, 그대는 나의 슬픔.
그대는 나의 세계, 그 속에 내가 영위하고
그대는 나의 안을, 그 안으로 내가 올라간다네.

오, 그대는 나의 무덤. 그 안에 나의 모든 근심을 묻었다오.
그대는 나의 안식처, 그대는 나의 평화.
그대는 하늘이 내게 준 선물.
그대의 사랑이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그대의 시선이 나를 나 이상으로 변화시킨다네.

그대는 나의 선한 영혼.
나의 더 나은, 나의 분신이여.


나는 연주가의 낭독에 심장이 울렁여, 속절없이 좌석 안으로 깊게 숨어들었다. 쿵쿵… 쿵쿵… 그냥— 네가 이만큼 반짝인다고 말해주는데,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가 그이길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하릴없이 사랑에 빠질 뻔했다.


나도 이렇게 마음을 전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면 좋을 텐데.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은 걸 보면, 여전히 어린아이인 채로 머물러 있는 것 같다.



앙코르 — 쇼팽 녹턴 20번


한참 어려운 것들을 헤쳐 와 이런 ‘나 유명해요’ 곡을 들으면, 연주가의 소리구슬이 내가 아는 곡조와 너무나도 절묘하게 맞닿아 가슴이 설레온다. 게다가 쇼팽의 품이 아닌가? 해가 완전히 저문 이 시간, 한밤 위에서 하는 달빛소리니 얼마나 듣기 좋겠는가.


같이 간 동행은 여기서 살살— 녹으셨다. 높은 음 하나가 뒤로 확 꺾일 듯 앙칼지게 공간을 휘잡아버리는 그 순간이 자꾸 기억에 난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왼쪽 눈으로 한 번, 오른쪽 눈으로 두 번. 높이 떠 있는 소리구슬을 한참 바라보다 ‘헌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처음의 마음을 다시 떠올렸다.


신기했다. 소리가 작곡가보다 더 커 보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피아노는 왼손과 오른손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악기구나. 물방울을 그렇게 얇고 높게 띄울 수 있구나. 백혜선 피아니스트는 피아노 앞에서 가장 바르고 곧게 서 있는 사람이구나.


우아한 여름비, 개운한 가을비, 맑은 소리. 연주가가 하고 있는 귀걸이보다 반짝이는 소리가,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흐르는 고백이 천장 아래에서 많이도 반짝였다. 그런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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