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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주 Aug 12. 2023

할아버지와 사진

할아버지는 취미로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작은 시골 마을 의사셨던 할아버지는 오토바이를 타고 이곳저곳으로 진료를 다니며 꽃과 나무, 풍경 그리고 사람들을 사진으로 남기셨어요. 5월에는 정원에 만개한 장미를 찍고, 8월에는 장마에 떠내려가는 나무들을 찍으셨습니다. 맑은 가을 햇살과 폭설이 내린 겨울도, 마음껏 기록하셨습니다. 그러곤 사진을 인상해 앨범에 하나하나 모으셨어요. 할아버지에게 사진은 순간의 기록을 넘어 일기장이고, 본인이 이 땅에 있었음을 알리는 삶의 흔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1993년 겨울의 시작에 할아버지의 사진은 크게 전환점을 맞이 했는데요, 첫 손주인 제가 태어난 것이죠. 당시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부모님께서는 박사 학위를 마칠 때까지 저를 한국 조부모님 집에 맡기셨고, 덕분에 저는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피사체가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순간 순간이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되는 유아 시절을 보냈습니다. 이제 할아버지는 5월의 장미 대신 만개한 장미 꽃 아래서 활짝 웃는 손녀의 모습을, 8월의 폭우 속에서 우비를 쓰고 뛰노는 제 모습을 담기 시작하셨어요. 가을 햇살을 맞으며 낙엽들 사이를 구르는 천진난만함, 추운 줄도 모르고 폭설이 내린 다음 날 아침 콧물을 흘리며 열심히 눈사람을 만드는 제 철없음이 할아버지의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여갔습니다.

어찌보면 지금 제 작은 아이폰 속 2만여장이 넘는 사진과 동영상은 이런 조기교육의 산물일지도 모릅니다.  할아버지가 무언가를 보면 사진부터 찍었던 것처럼 저도 무언가를 보면 카메라부터 드니까요. 할아버지의 습관 그대로, 나도 사진을 찍고나면, 사진기에서 곧장 눈을 뗍니다. 그리곤 제 두 눈으로 다시 한 번 그 순간을 음미하며 머무른다. 그 순간이 꼭 아름답지만한 것은 아닙니다. 때론 아주 슬펐던 날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제 그림자를 찍기도 하고요, 머나먼 미래에 떠올려도 어이없어하며 실소를 터뜨릴 만큼 화가난 순간에 눈 앞에 보이는 사물을 아무렇게나 찍기도 합니다. 중요한건, 꼭 느껴야 하는 감정, 꼭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사진의 형태로 남기는 것이에요. 사진이 일종의 일기장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할아버지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사진 그 자체일 겁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에 담겨있는 시선. 저를 향한 그의 시선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값진 유산이겠지요. 사진은 찍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들 합니다. 할아버지가 남긴 사진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울고 짜증내고 투정부리는 손녀를, 여전히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담겨져 있습니다.

살다보면 그 누구보다도 제가 제 자신의 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제 자신이 죽을만큼 미워질 때면, 할아버지가 찍은 제 사진들을 봅니다. 그 속에는 제가 있고, 저를 보는 그의 눈길이 있습니다. 인형과 미용실 놀이를 한다며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바람에 더벅 머리가 된 제 모습도 있습니다. 더벅머리가 된 손녀의 모습을 찍으면서 할아버지는 어떤 표정이셨을까요. 분명 웃고 계셨을겁니다. 사진이 그렇게 말해주기 때문이에요. 그 사실을 기억하면 지금 제가 한 크고 작은 실수도 조금은 가볍게 웃으며 넘길 수 있습니다.

오늘도 그의 시선으로 나를 봅니다. 덕분에 저는 제 자신이 조금 더 좋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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