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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언 Jun 20. 2022

인도에서 얻은 개똥철학

인도 바라나시



“나도 너처럼 도전해보고 싶다. 나도 사실 꿈이 있어. 그런데 지금 가진 것을 잃게 될까 봐 두렵다.”


우성이는 어디서나 주목받는 친구였다. 큰 키에 잘생긴 얼굴과 털털하고 유쾌한 성격까지 모두 갖춘 그를 사람들이 반기는 것은 당연했다. 거기에 좋은 학벌과 넉넉한 집안까지 그는 소위 말하는 엄친아였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이름 있는 회사에 취직했고 나의 세계여행을 응원하며 가끔 안부를 전했다. 모든 걸 다 가진 우성이가 나에게 부럽다니.


“내 꿈은 오지 탐험가야. 오지 여행을 떠나서 오지는 사진을 찍고 싶어. 이거 볼래? 내가 찍은 사진인데 어때?”


나는 평생의 꿈이었던 세계여행을 하고 있으면서 막상 우성이에겐 “해보고 싶으면 그냥 해봐!”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 분야에 뛰어드는 것은 승률 0%에 가까운 도박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에 꿈을 향해 꿈틀거리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어제 같은 오늘을 또 한 번 살아내는 날이 있다. 이제 꿈보다 현실을 좇을 나이라며 스스로 다독이고 잠을 청하지만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아 괴로운 날이 있다. 그 마음을 알기에 그의 연락에 가볍게 답할 수 없었다.




동남아시아 여행을 끝내고 인도 바라나시에 온 지도 벌써 보름째이다. 바라나시에 한 달 이상 머무는 장기 여행자가 많다고 하던데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딱히 할 것은 없으나 종일 갠지스강에 앉아 짜이 한 잔 마시며 인도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사람 지나기도 좁은 골목길에 소도 다니고, 개도 다니고, 사람도 다니고, 오토바이도 다닌다. 정신없이 울려대는 클락션 소리 뒤로 반가운 한국말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철수 씨 사촌이에요.”


바라나시엔 한국말에 능숙한 인도인이 많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철수 씨의 이름은 한비야가 지어준 것이다. 그녀가 다녀간 이후 유명한 연예인이 줄줄이 철수 씨의 보트를 찾았다고 한다.


좁은 골목을 따라 구경하고 있는데 악기 교실이라고 쓰인 종이가 눈에 띄었다. 젬베를 배워보고 싶다는 지태를 따라 서너 명이 앉으면 비좁아서 누군가는 도로 나가야 할 것 같은 음악 교실에 왔다. 벽에는 우쿨렐레부터 인도 전통 악기까지 처음 보는 악기가 줄줄이 걸려있었다. 관심이 생긴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인도 전통 악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런 건 배우려면 얼마나 걸려?”

“저런 클래식 악기는 한 선생님에게 10년은 배워야 내공이 생겨.”

“뭐? 10년이나? 와 너무 오래 걸린다.”

“10년이 뭐 오래야, 10년은 우리 생각보다 금방 가.”


10년 뒤면 나는 곧 마흔인데 그게 오래가 아니라고? 돈 벌어서 집 사고, 차 사고, 한국에서 자리 잡으려면 10년으로 부족한데 악기 하나 배우려고 인도에서 10년은 못 있겠다, 생각하는 찰나 젬베 선생이 말을 이었다.


“삶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내 친구는 이 근처에서 평생 악기를 가르쳤어. 그는 남은 인생도 당연히 여기에서 악기를 가르칠 거라 믿었지. 그런데 어느 날 정부가 헐값에 학원을 사들였고, 그는 바라나시를 떠났어.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라.”


띠까 띠까 따까- 지태에게 젬베를 시범 삼아 쳐 보이고서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오늘과 똑같은 내일이 영원할 거라고 막연히 믿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내일은 아무도 알 수 없어.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지. 그러니 오늘을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해. 막연한 불안함을 지키기 위하여 행복을 포기하면 안 되는 거야. 짜이 한 잔 마실래? 곧 내 친구가 짜이를 들고 올 시간인데.”


그가 건넨 짜이를 마시는데 문득 우성이가 떠올랐다. 미래를 위해 오늘의 꿈과 행복을 포기하고 불안함에 잠시도 쉬지 못하는, 경주마처럼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삶인 것을 알지만 쉽게 멈출 수 없다고 그는 말했었다.

한국에서의 내 삶도 그랬다. 몇 살까지 이 정도는 해내야지, 계획을 세워놓고 그날을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힘들어서 곧 죽어도 무조건 버티는 게 덕이라고 배웠다. 이따금 사는 게 힘들다고 말하면 엄마는 조금 쉬어가라는 말 대신 너만 힘드냐고 오히려 나를 혼냈다. 달리고 달리다가 힘에 부쳐 넘어졌을 때, 나는 나를 위로하는 대신 고작 이것밖에 못 하냐며 자학했다. 나까지 나를 몰아세울 필요는 없었는데. 나만큼은 내 편이 되어줘도 좋았을 텐데. 마지막까지 채찍질하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기 전에 내 속도를 찾아 쉬엄쉬엄 걸어도 괜찮았을 텐데.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야. 더 배우고 싶으면 내일도 와.”


수업 끝을 알리는 그의 목소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도 멈췄다. 오늘 배운 것은 젬베였을까, 짜이 한 잔에 담긴 인생이었을까.



에세이 <어차피 오늘이 그리워진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출간 기념 연재는 매주 월요일 브런치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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