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이란 무엇인가」, 스티븐 D.헤일스
서양 철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론』에서 ‘에르 이야기(The Myth of Er)’를 소개합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어느날 죽음을 맞이한 에르(Er)가 사후세계를 관찰하고 탐구한 뒤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가 겪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식으로 전개되죠. 에르에 따르면 죽음을 맞이한 인간은 육신으로부터 영혼이 분리되고 그 영혼은 약 천 년 동안의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영혼들은 이승에서의 삶이 선으로 가득했다면 천국을, 죄로 가득했다면 지옥을 여행하죠. 그렇게 영혼들은 천 년 간의 여행을 마치고 신비한 초원으로 돌아와 운명의 여신 중 하나인 라케시스에게로 안내됩니다. 이때 영혼들 앞에 선 라케시스는 제비로 꽉 채워진 상자를 들고 있습니다. 제비의 내용은 영혼들이 살게 될 다음 생애의 형태였죠. 가령 폭군의 생애, 망명자의 생애, 거지의 생애, 고귀한 생애 등이었습니다. 영혼들은 각자 순서에 따라 라케시스의 제비를 뽑게 됩니다. 이토록 아주 우연한 방식—제비뽑기—으로 영혼들의 운명이 순식간에 결정 지어진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 낡은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의 운명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성별이나 외모, 가정환경 혹은 태어날 국가—인간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삶의 결정적인 요소—등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라케시스의 제비뽑기에 따라 무작위로 운명을 건네받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행운으로, 누군가에게는 불운으로 다가올 운명을 말이죠. 그런데 이에 대해 운이란 인간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과감하게 딴지를 거는 학자가 있습니다. 행운과 불운에 관한 인간의 미신적 사고와 실체를 과학적으로 해명하고자 시도한 오늘의 책, 스티븐 D. 헤일스의 『운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메난드로스는 말합니다. “티케는·······모든 논리를 파괴하고 우리의 기대를 거스르며 다른 결과를 계획한다. 티케는 모든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다(메난드로스, 『피리 부는 소녀』.” 여기서 메난드로스가 말하는 티케(Tyche)란 그리스인들이 상상하여 만들어낸 행운의 여신입니다. 즉 그리스인들에게 운이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흐름이자,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무작위성이죠. 이러한 운의 관념은 로마로 수입되어 포르투나(Fortuna)로 이름만 바뀌어 반복됩니다. 로마인들은 포르투나를 숭배하는 성전을 만들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운의 변덕을 통제하기를 기도했죠. 이처럼 오랜 시간 운은 인간사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지만 인간의 기대를 번번이 빗나가는 변덕을 발휘해왔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도섭스러운 운에 맞서 인간은 어떻게 반응해왔을까요? 역사적으로 운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번째는 순종입니다. 운에 순종하는 이들은 포르투나를 달래거나, 행운을 독차지하기 위해 애씁니다. 가령 행운의 부적을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길일 달력을 만들어 어떤 날에 태어나야 운이 좋은지를 점치기도 하고, 혹은 악마의 눈을 만들어 불운을 쫓기 위해 노력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행운을 자기편으로 끌어오거나, 불운을 멀리하기 위한 행위들로, 즉 운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르투나의 위세에 순종하는 것이죠.
두번째 반응은 반항입니다. 이는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의 한 유파였던 스토아학파의 전략으로 인간이 행운이나 불운을 경험하는 것이 순전히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가령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행운, 좌절되면 불운이라 느끼는 식이죠. 이들은 포르투나가 우리 삶에 드리우는 행운이나 불운에 휩쓸리지 않고 무심한 마음을 유지하는 아파테이아(부동심)를 강조합니다.
끝으로 운을 대하는 인류의 세번째 반응은 부정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들에 따르면 우리네 삶에 펼쳐지는 사건들은 그저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것에 불과하며, 다만 인간의 착시현상으로 인해 그것들을 운으로 착각할 뿐이라 설명됩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다양한 선택지 중에서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운을 대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학자들은 보다 탁월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운이 무엇인지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기 시작합니다.
역사적으로 운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됩니다. 첫 번째는 확률이론입니다. 이는 운의 개연성을 확률로 계산하려는 시도로서, 이에 따르면 운이란 1)발생 확률이 낮고, 2)중요한 사건입니다. 가령 동전을 여러 번 던져서 앞면만 연달아 나오는 사건은 운이라 할 수 없습니다2. 발생 확률은 낮지만, 그다지 중요한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에 반해 복권에 당첨되는 일이 커다란 행운인 이유는 당첨될 확률이 몹시 적은 동시에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피츠버그 대학의 철학자 니콜라스 레셔는 이를 다음의 공식으로 정리합니다.
λ(E)=Δ(E) x pr(not-E)
레셔의 공식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건의 중요성이 크고, 발생확률이 낮을수록 운의 양도 커진다는 것을 나타내죠. 다만 확률이론은 몇 가지 한계에 부딪힙니다. 가령 1)비행기의 사고 확률을 구할 때 준거 집합을 어떻게 설정(전 세계에서 운행중인 모든 비행기록을 기준으로 계산할 수도 있고, 기장 한 사람을 특정해서 그의 비행기록만을 계산할 수도 있으며, 혹은 장마철의 비행기록, 최근 5년간의 비행기록 등 무수히 많은 기준이 존재한다) 하는지에 따라 비행기 사고는 운이 될 수도, 평범한 사건이 될 수도 있으며, 2)골프의 홀인원처럼 평균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무작위로 발생하는 일회적인 사건들은 확률로 해석하는 것이 그다지 효력이 없습니다(저자는 이를 잡음신호 문제라고 이름 붙인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어쩌면 열 번 만에, 어쩌면 몇 천 번의 샷을 시도한 끝에 성공한 홀인원 속에서 통계적 경향을 분석하고자 하는 것은 잡음이 섞인 라디오에서 노래를 알아들으려 애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3)확률이론은 가능성은 정확히 계산하지만 그것의 유의미성에 대한 해석을 일관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합니다(서울의 A지역을 국가에서 완전금역구역으로 지정할 정책을 펼 확률은 매우 낮다. 이 경우 누군가는 해당 정책을 행운으로, 누군가는 불운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이러한 모순과 한계로 인해 확률이론은 운을 설명하는 완벽한 이론이 되지 못하죠.
두번째 이론은 양상이론입니다. 양상이론의 출발이 된 개념은 반사실적 사고입니다. 반사실적 사고란 현실세계에서 벌어진 사건과 다른 상상을 해보는 것입니다. 가령 입시에서 한 문제 차이로 대학에 낙방한 수험생이 만약 다른 답을 찍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처럼 말이죠. 인간은 이러한 상상을 발휘하여 로또에 당첨되어 고급 아파트에서 사는 삶(가능세계)을 그리기도 하고, 혹은 지금보다 훨씬 매력적인 외모로 변모하여 대중의 인기를 만끽하는 삶(가능세계)을 꿈꾸기도 합니다. 현실세계는 수많은 가능세계 가운데 실제로 실현된 세계이죠. 이때 가능세계들은 현실세계와 각기 다른 거리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현실세계에서 아주 사소한 변화만 있더라도 실현될 수 있는 가까운 가능세계가 있고, 대단히 극단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실현될 수 있는 머나먼 가능세계가 있죠. 양상이론가들은 이를 양상적으로 ‘취약하다/견고하다’ 라고 표현합니다. 예컨대 복권 당첨은 추첨 기계 안의 공이 조금만 더 회전했더라도 당첨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양상적으로 취약한 사건입니다. 조금의 변화만 있었더라도 복권에 당첨되지 않은 가까운 가능세계가 현실이 될 수 있죠. 반면 ‘1+1=2’라는 필연적 진리나,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자연 법칙들은 양상적으로 견고합니다. 그렇지 않은 가능세계가 실현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죠. 이러한 양상이론에 따르면 운이란 유의미하고 양상적으로 취약한 사건입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 룰렛(6개의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각 참가자가 번갈아가며 본인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복불복게임)에서 살아남는 것은 확률이론에 따르면 생존확률이 무려 5/6이므로 행운이라 할 수 없지만, 양상이론에 따르면 대단히 큰 행운으로 해석되죠. 그러나 양상이론은 취약함과 견고함의 기준이 대단히 주관적이라는 한계를 피해 가기는 어렵습니다.
끝으로 세번째는 통제이론입니다. 통제이론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사건을 운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에 따르면 복권에 당첨되거나, 러시안 룰렛을 하고도 살아남은 것은 사건의 당사자가 결과를 통제한 것이 아니므로 행운이라고 해석되죠. 다만 여기서 문제는 인간이 무엇을 통제한다는 인지적 감각이 착각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시는 고무손 실험입니다. 피실험자의 두 손 중 한 손은 스크린 반대편에 두어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두고 대신 그 자리엔 고무손으로 대체합니다. 다음으론 시야 밖에 있는 손과 고무손을 붓으로 동시에 간지럽히기 시작하다가 점차로 고무손만 간지럽힙니다. 이때 피실험자는 고무손만 간지럽히고 있는 것을 눈으로 목격하고도 마치 자신의 실제 손이 간지럽다는 착각을 하게 되죠. 즉 인간은 자신의 신체기관에 대해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직관과 느낌은 너무도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통제이론 역시 운을 설명하는 완벽한 이론이라 하기 어렵죠.
앞서 우리는 운을 설명하는 세 이론과 더불어 각 이론들의 한계를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각 이론이 풀어야 할 더 어려운 숙제는 따로 있습니다. 첫번째 운의 난제는 운의 시간적 관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슬롯머신을 떠올려볼까요? 게임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참가자가 레버를 당기면 3개의 릴은 수박, 포도, 사과 등 다양한 이미지로 회전하다가 순서대로 정지합니다. 세 개의 이미지가 모두 같은 그림이라면 참가자는 어마어마한 상금을 차지하죠. 이제 한 참가자가 레버를 당깁니다. 잠시 후 첫 번째와 두 번째 릴이 모두 사과에서 정지합니다. 참가자는 당연히 세 번째 릴도 사과에서 멈추길 소망하죠. 그런데 잠시 후 정말로 세 번째 릴도 사과에서 정지했고 참가자는 막대한 상금을 차지합니다. 과연 이것은 행운일까요? 흥미롭게도 이에 대한 답은 시간적 관점에 따라 다릅니다. 저자에 따르면 시간적 관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바라보는 통시적 관점과, 특정 시기에서만 사건을 바라보는 공시적 관점으로 구분됩니다. 통시적 관점으로 볼 때 세 번째 릴이 사과에서 정지한 사건은 행운이 틀림없습니다. 가령 참가자 입장에서 첫 번째 릴은 사과가 아닌 그 무엇에 정지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두 번째 릴이 사과에서 정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기분이 조금 좋을 뿐 아직 참가자가 얻은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마침내 세번째 릴이 사과에서 정지한 것은 참가자에게 막대한 상금을 거머쥐게 합니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세 번째 릴의 역할이 행운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죠. 반면 공시적 관점에 따라 세 개의 릴이 사과에서 정지한 사건을 따로 떼어 해석한다면 셋 중 무엇이 나머지보다 큰 행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확률이나 양상, 통제 가능성이 모두 동일하기 때문이죠. 즉 세 번째 릴이 사과에서 정지한 사건은 통시적으로는 운이지만, 공시적으로는 운이라 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운에 관한 세 이론(확률이론, 양상이론, 통제이론)은 공시적 운과 통시적 운에 대해 일관적인 설명을 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난제는 도덕적 운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도덕성이 운에 따라 변덕스러이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운에 따라 도덕성이 달리 평가되는 경우는 흔하며, 학자들은 이를 ‘도덕적 운’이라 하죠. 도덕적 운의 첫번째 유형은 태생적 운입니다. 말하자면 타고난 성품이 도덕성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가령 모험심이 강하고 위험을 과감하게 무릅쓰는 성향을 타고난 사람과, 매사에 겁이 많고 불확실한 미래에 기대를 걸지 않는 신중한 성향을 타고난 사람은 도박의 유혹에 다르게 반응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후자가 불법 도박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의 도덕성은 태생적으로 도덕을 발휘하기 유리한 성품을 타고난 도덕적 운 덕분이라는 이야기이죠. 또 다른 유형은 상황적 운입니다. 도덕을 발휘하기에 불리한 성품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러한 성품이 드러날 상황에 모두가 처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령 타인을 헤치는 것에 별다른 죄책감을 갖지 못하는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총기소유가 자유인 나라에서, 또 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보다 잔혹한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큰 사람은 전자입니다. 즉 상황적 운이 도덕적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마지막 유형은 결과적 운입니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초래한 결과에 따라 도덕적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가령 두 사람이 음주운전을 했을 때 누군가는 사람을 치고, 다른 한 사람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면 전자의 경우가 더 큰 비난에 직면할 것입니다. 행위의 결과가 도덕적 평가에 영향을 준 거죠.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확률이론은 이러한 도덕적 운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가령 우리가 어떤 성품으로 태어나느냐 하는 문제는 운이 아니라 생물학적으로 높은 확률로 결정된 개연적인 사건입니다. 타고난 성품으로 도덕적 행동을 했다면 운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전적 특질이 발휘되었을 뿐이라는 거죠. 양상이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A라는 사람의 유전암호가 지금과 달랐다면 그는 A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A로 존재하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그는 현재와 같은 성격을 공유했을 것이므로 A의 도덕적 행동은 양상적으로 견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희망은 통제이론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품으로 태어날지, 어떤 상황에 처할지, 혹은 이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를 결코 통제할 수 없습니다. 즉 통제이론만이 유일하게 도덕적 운을 지지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통제이론이 곧 살펴볼 세 번째 운의 난제를 해결해주길 기대해야 하는 상황이죠.
마지막 운의 난제는 인식적 운입니다. 인간은 인식을 통해 지식을 구성합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인식이 순전히 운으로 주어진다면 어떨까요? 인식적 운으로 쌓은 지식도 지식이라 불릴 수 있을까요? 손쉬운 예로 러셀의 시계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가령 여러분의 눈 앞에 배터리가 고장난 시계가 3시에 멈춰 있습니다. 이를 본 여러분은 지금 시간이 3시라고 확신하죠. 다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실제로 지금이 3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타당한 근거, 즉 3시를 가리키는 시침을 인식함으로써 틀림없는 지식을 구성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 여러분의 인식은 운에 불과했죠. 만약 조금만 먼저, 혹은 조금만 나중에 시계를 봤더라도 여러분은 잘못된 지식에 도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식적 운은 통제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통제이론에 따르면 운이란 인간의 통제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인데 인간은 스스로의 인식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령 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며 바깥 세상이 춥겠다, 라는 믿음이나 2월은 3월보다 짧다, 라는 객관적 사실, 혹은 콜라보다 사이다가 맛있다, 라는 주관적 사실들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형성하는 인식이 아니라 그저 마주침에 따라 유발된 인식입니다. 즉 통제이론을 전제한다면 지식은 모두 운의 문제가 되어버리죠. 따라서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만약 우리가 양상이론과 확률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도덕적 운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또한 도덕적 운을 지지하기 위해 통제이론만을 받아들인다면 지식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되죠. 즉 그 어떤 이론도 운의 난제를 일관성 있게 설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스티븐 D. 헤일스의 『운이란 무엇인가』를 간단히 정리해보았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운이란 인지적 환상이자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운이란 우리 자신의 행위이며,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관점이다.”). 즉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질 뿐이라는 이야기이죠. 프랑스의 학자 쿠르노(Antoine-Augustin Cournot)는 말합니다. “독립된 계열들에 속하는 현상들의 조합이나 마주침 때문에 인과적으로 발생한 사건들이 우리가 운이라고 부르는 것들이거나 아니면 무작위성으로부터 발생한 것들이다(『가능성과 확률의 이론에 관한 설명』).”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가령 약속에 늦은 한 여자가 텅 빈 횡단보도 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서는 술에 취한 운전자가 도로 위를 질주합니다. 잠시 후 운전자는 횡단보도에 홀로 선 여자를 치고 여자는 숨을 거둡니다. 끔찍이도 운이 없었던 사고이죠. 하지만 쿠르노에 따르면 약속에 늦은 여자와 술에 취한 운전자의 인과계열이 그저 마주쳤을 뿐입니다. 이처럼 독립적인 인과계열의 마주침을 ‘사건événement’이라 하죠. 요컨대 삶은 행운도 불운도 아닌,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쿠르노의 이론처럼 현실세계에는 무한대에 가까운 인과계열들이 병존하고, 그것들은 쉴 새 없이 마주치며, 따라서 인간은 끝없는 사건을 마주하며 살아가죠. 아무쪼록 행운의 덧없음과 불운의 공포에 맞서 사건의 무의미성을 위로삼아 삶이라는 희대의 사건을 담대히 견뎌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