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처음 이 책을 느리게 읽으며 소개했던 것이기도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이번 챕터입니다. 제가 몇 년에 걸쳐서 깨달아간 것을 단 몇 장의, 아니 몇 줄의 글로 명쾌하게 정리해 주는 것. 책을 읽는 쾌감과 행복이 이런 것일까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 부분이어서 더 정성스럽게 나누고 싶습니다.
몇 년 전까지의 제 목표가 딱 이거였습니다. 행복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제발 불행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지금 돌아보면 단지 당연한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버거워서 현재의 삶이 너무 무거웠고,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그냥 현재의 무탈함을 바랐지요. 그냥 무탈하게 삶이 흘러가기만 해도 좋겠다고 말이죠.
책의 인용구를 통해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이 들 때에는 희망을 가졌다 무너지는 게 희망이 없는 것보다 더 아프고 힘드니까요.
힘들지 않기를 원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특별한 좋은 상태'를 바라는 것에 비하면 소박하고 검소한 바람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마음을 공부하고 진료 경험을 쌓아가며 느낀 것은, 실제로 '행복하기'보다 '힘들지 않기'가 훨씬 더 어렵고 또 무리한 소망이라는 것이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79.
혹시나 제목을 보고 기대하신 바가 있었다면 좀 실망스러우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이 어찌 보면 우리가 더 이상 '힘들지 않기' 위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먼저 인용구와 함께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하기'보다 '힘들지 않기'가 더 무리한 소망이라는 것. 이해가 되시나요..?
각자의 힘듦과 고통이 다 다를 것이고, 아마 제 힘듦은 누군가의 힘듦에 비하면 투정 수준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의 힘듦이 가장 힘들 듯이, 행복 대신 힘들지 않기만을 바란 제 마음은 정말 간절했습니다. 친구가 사용한 표현을 듣자마자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생생합니다.
'폭우 속 갈라지고 무너져가는 댐을 혼자 온몸으로 막고 있는 기분'
몸과 마음은 이미 젖어서 춥고 떨리지만, 혼자서 그 물을 맞으며 틈을 틀어막고 있는 느낌.
젖은 몸과 불어나는 물보다 더 두려운, 댐이 무너질 것이라는 확실한 미래와 마주하는 절망감.
저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나는 이 틈을 막아내고 반드시 행복해지겠어'와 같은 대사를 할 수는 없지 않았을까요? 소설이나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이 아니라면요. 부러지고 망가질 것이 선하지만, 막지 않은 것도 불가능해서 그냥 온몸으로 물을 맞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책에서 말하는 일상의 작은 행복들을 잡아보려고도 했으나, 온몸으로 틈을 막고 물살을 맞는 몸으로는 손을 뻗지도 눈을 돌리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책을 읽으면서도 화가 잔뜩 나서 책을 멀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숨도 못 쉬게 힘든데 자꾸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으라고 하니 말이지요..
버틸 만큼 버텼다고 생각했을 때, 다행히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그것 역시 제 의도는 아니었고 운이고 우연이었습니다. 쏟아지는 폭포를 맞다가 벗어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숨을 들이켜기에 급급했지요.
간신히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허무해졌습니다. 제가 막고 있던 그 자리가 그냥 수도꼭지 아래였거든요. 수도꼭지의 버튼을 줄이거나, 혹은 한 발짝만 벗어났어도 그렇게까지 물을 뒤집어쓰지 않았을 수 있었는데.. 쏟아지는 폭포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제가 보지 못했던 거였습니다. 내가 막은 틈도 분명히 존재했지만, 다른 금 간 부분들에 비하면 실금이기도 했고요.
이를 통해 아름다운 깨달음을 얻었다면 좋겠지만, 어찌나 허무하고 답답하던지. 사실 힘들었던 시기보다 그 허무함을 참아내는 시간이 더 길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았는지 하는 자책의 시간. 허무함을 좀 지나고 보니 내가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수용의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이를 통해 깨달은 것이라고는, 각자의 '깨달음'은 결국 무너지고 깨진 이후에 찾아온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에서 벗어나고 난 허무함으로 상담선생님에게 자주 하소연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강제 성장' 당했다고. '사람들은 어려움을 통해 성장한다고 하는데, 저는 성장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성장, 성숙 안 해도 되니까 이렇게 힘들지 않기만을 바랐는데... ' 하면서 투정을 한참 부렸습니다.
그러다가 선생님의 말을 듣고 깨달았지요. '강제 성장'을 어차피 이미 하게 되었으니, 그냥 성장하고 성숙했다는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어쨌든 내가 성장하고 성숙한 것은 맞고, 그게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나쁜 게 아니니까 그냥 받아들이자고. 어차피 크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말이죠. 그리고 세상은 앞으로도 나를 '강제 성장' 시킬 것이라는 것을요.
그럼 이렇게 계속 힘들고 '강제 성장'을 당하는 게 내 삶에 정해진 수순인가?라고 생각될 때, 조카를 만나서 큰 것을 배웠습니다. 언니가 낳은 예쁜 딸이지요. 집안에 첫아기라서 귀여움도 사랑도 많이 받은 그 친구에게 삶을 사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온몸으로 혼자 댐을 막고 있던 시기, 유일하게 제 위안이 되어주는 것이 그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친구는 제가 '강제 성장'이라는 키워드에 고통받던 것을 벗어나도록 직접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막 태어난 조카는 밥만 먹어도, 눈만 떠도, 심지어 똥을 싸도 박수를 받았습니다. 좀 더 커서 걸어 다니고 말을 시작할 때에는 어찌나 귀엽던지. '이모'라고 불러주던 때가 아직도 기억납니다. 그때 조카가 어린이집에 가며 매일 하던 말이 '나도 빨리 언니가 되고 싶다'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지나 지금 한창 미운 다섯 살을 지나는 조카는.. 돌아다니고, 밥 먹고, 잠자는 것까지 혼나며 지내고 있지요. 어쩌면 나는 크고 싶지 않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전에는 '언니'가 되겠다고 벼르던 아이가 요즘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나 언니 안 할 거야'니까요. 조카도 저처럼 '강제 성장'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카가 '언니'가 되고 싶지 않다고 '언니'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조카에게는 동생이 생겨버렸거든요. 아이마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조카가 이 상황에서 택한 방법이 제게 대답이 되어주었습니다.
일단은 '언니'가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동생을 챙깁니다. 예뻐하기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하고, 엄마가 동생을 돌보는 동안 혼자 놀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가끔은 저항합니다. 팽 돌아져서 동생에게 '저리 가'라고 소리치기도 하고, 가끔 격하게 동생을 밀쳐서 혼나기도 하고, 엄마한테 동생만 보지 말고 나를 봐달라고 울기도 하지요.
우리도 똑같지 않을까요? 불행한 내 삶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결국 받아들이는 것. 그냥 그것도 내 삶이구나 받아들이고 같이 가다가, 도저히 못 참겠으면 팽 돌아서서 미워해보기도 하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함께하다가 미워하다가를 반복하면서 없어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결국 오늘도 수용입니다. '힘들지 않기'가 불가능임을 받아들여야 시작되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받아들이는 수용의 이야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번 장(축)의 제목은 '탈융합'이듯이 '힘들지 않기'는 불가능하지만, '덜 힘들기'가 가능한 방법을 찾는 것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고 이해하고 또 안아주기 시작하면 '어찌할 수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불안이 멈춰야 비로소 행복의 여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불행이 일상처럼 함께하더라도, 그래도 생을 살아볼 만하다고 느끼게 해주는 작은 의미들을 모으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행복의 원리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84.
작가님은 일상의 행복을 찾는 것. 불행한 가운데 행복의 조각을 모아보는 것이라고 표현한 것.
한창 힘들 때 책을 읽으며 제가 화가 났던 것은 '일상의 작은 행복'을 찾는 것의 전제를 '불행에서 벗어나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불행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알았기 때문에 일상 속 행복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래서 이 인용구는 오히려 와닿습니다. 삶이 계속 불행할 거라는 것을 인정하고, 행복의 조각조각들을 모으는 것. 조각이다 보니 가끔 그 조각을 주우려다가 손이 살짝 베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그 조각을 바라보고 손을 뻗어보는 것.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요?
어쩌면 너무 허무주의와 같은 결말이고, 불행에 패배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가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것을 우리가 바꿀 수 없듯이, 불행은 우리와 함께 간다는 것이 진리입니다. 책에서 작가님이 쓰신 용어로 '불행한 나의 행복'이라는 말이 와닿습니다. 우리는 모두 불행하겠지만, 그 와중에 분명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지요. 솔직히 저 역시 최악의 상황에서만 벗어났을 뿐, 비슷한 상황은 계속 벌어집니다. 저는 여전히 금 간 댐 앞에서 물을 맞고 있습니다. 제가 댐을 막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든요. 대신 폭포처럼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피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의 틈을 막고 있지요. 가끔은 제가 읽은 책과 열심히 쓴 글들로 그 틈을 덧대어 잠시 막아두고 행복의 조각들을 주우러 잠시 자리를 비울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불행하지만, 그래도 불행하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아도 되니 불행하지 않기'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기만 하지 않기'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제가 하고 있으니 여러분도 하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도 '불행 중의 행복'을 찾게 되는 순간을 맞이하시길 기원하며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