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오늘 챕터의 제목은 '수없이 깨져왔을 삶의 그릇이 피워낸 아름다움-인생이 무참히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이다. 상처받지 않고 사는 삶이 없으며, 그 깨지고 부서진 것이 삶의 아름다움으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슬프지만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서는 수용 전념 치료에서 삶을 표현하는 비유로 '킨츠키'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내용을 요약해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킨(金)'은 일본어로 '금', '츠기'는 '잇다'라는 뜻이다. 일본의 한 장군이 선물 받은 진귀한 찻잔을 깨뜨리고 잔을 수리하게 했다. 하지만 단지 균열대로 이어 붙이고 금속으로 고정한 잔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깨진 도기를 전문으로 수선하는 장인에게 맡긴다. 그 장인은 원래대로 복원하는 대신 균열을 온전히 포용하는 금실의 흐름으로 잔을 이었다. 새로 탄생한 잔은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품을 채로 다시 태어났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89.
오늘 챕터와 관련하여 가지고 있던 소소한 고민은 직업과 관련한 고민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교사가 직업이다 보니. 깨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인데, 이렇게 티 없이 맑게, 안전하고 풍족하게만 보내도 되나 하는 걱정이 드는 것이다.
일생 동안 한 번도 금이 간 적 없이 마치 온실 속 화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나는 그러한 이들을 보면 어쩐지 갓 탄생하여 미세한 균열 하나도 없는 새 도자기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온전함이 아름답다기보다는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이다. 그들의 태평함과 해맑음이 부러울 뿐, 특별한 아름다움이나 깊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90.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신도시에 위치하고 있다. 신도시 특유의 평탄하고 깔끔한 길, 주변을 둘러싼 편의 시설, 특히 '신도시'이기 때문에 주변에 유해 환경 자체가 거의 없다. 주택가도 '카페거리'라는 이름으로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고, 밤길에 다녀도 별로 위험하지 않으며, 곳곳에 정돈된 공원이 위치한다. 여기서의 유해환경은 생명이나 안전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는, 술집이 많고 취객들이 조금 있는 유흥 거리 정도이다. 집안 환경이 어려운 친구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위 인용문의 '온실 속 화초' 같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상처받는 것에 너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 세상에 나아가면 반드시 깨질 아이들... '상처받고' 지내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지 않는 것이 불가능함'을 받아들이지 못한 아이들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그래서 대학에 가서 찾아온 아이들이 의외로 대학 가서 별로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자취만 시작해도 지금과 같은 주변 환경이나 삶을 누리기 어려우니 말이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너무 안전하고 풍족한 환경이 몸도 마음도 약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꼰대 같은 어른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풍족하고 공정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지내기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다.
이번 1학기 수행평가로 고3 학생들을 대상으로 '면접 답변 구상하기' 수행평가를 진행했다. 학생들이 선택하는 선택 문항 중에서 '개인 활동과 모둠 활동 중에 무엇을 더 선호하는가?'라는 질문과, '길에서 거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다음 날 그 거지를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이 있었다. 이 질문에는 정말로 '정답'이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이고, 거기에 따라 학생의 가치관이 엿보인다.
여러 질문 중 더 두 가지 질문을 소개하는 이유는 상처받지 않고 안전하게 자란 아이들의 답변이 가장 잘 보인다는 것이다.
먼저 개인활동이 좋다고 한 친구든, 모둠활동이 좋지만 그 한계점에 대해서 언급한 친구든 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이야기한 것이 '함께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롭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무임승차'하는 아이들까지 있으니 그런 '공정하지 않은' 상황을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는 사실이다. 혼자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공정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함께 하는 것의 장점을 잘 배워보지 못했고, 주변 친구들과 상대 평가로 경쟁하는 구도에 익숙한 아이들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거지에 대한 답변은 공부 잘하는 친구들의 답변이 더 충격적이었는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줄 필요 없다'라는 논리를 폈다는 점이다. 물론 노숙자나 거지가 노력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 그 자리에 가기 전에 겪은 고통이 모두 소거된 채, '불필요한 인력에 대한 혐오'가 드러나는 답변을 읽으며 할 말이 없었다.
사회에 나가면 나와는 다른 사람과의 협업이 모든 일의 시작이자 끝일 거라고 이야기했을 때, 신도시의 편안한 환경에서 지내고 공부에 집중 가능한 지금의 환경이 부모님과 환경을 잘 타고난 것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는 피드백을 주었을 때. 반항한다기보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던 그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사실 더 큰 것은 이 수행평가가 '면접'의 답변이었다는 것이다. 사회에 나가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면접이라고 생각하고 답변을 하는 것인데, 타인과 함께하지 않는 것이 편하고, 타인을 도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세상 모두가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받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요즘 모둠 활동을 시키면 아이들은 '협업'하지 않고 '분업'한다. 그리고 그 분배가 아주 '공정'하다. 모둠장을 시킨다고 해도 그냥 선생님과 소통하는 역할에 가깝다. 개인의 능력과 잘하는 것에 상관없이 아주 공정한 1/n. 그래서 함께 하나의 결론을 내거나 하나의 프로젝트 형의 과제를 내면 아주 어려워한다. 분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상처받고 싶지 않은 아이들의 방어기제라는 생각도 든다. 수많은 모둠활동을 통해 누적되어 온 상처로 인해 1/n을 하게 된 게 아닐까라는 상상도 해본다.
그래서, 그럴수록 나는 더 모둠활동을 한다. 사회에, 세상에 나가서 한 번의 망치질로 부서질 연약한 도자기 대신, 조금은 견뎌내고 버텨내는 아이들이 되길 바라며 말이다.
오늘 쓴 것도 일례에 불과할 뿐 아이들이 삶에서의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들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학교에서 그것을 배운다 아니다가 아니라 사회 분위기 자체가 삶에 대해 배우기보다 공부와 학력을 강조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이들이 깨지고 부서지는 것은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대입에 실패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삶이 흔들릴 때 스스로 바로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부모님과 어른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삶을 조율해 줄 수 없다. 결국 공부 외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아이들이 이긴다.
대입이든 성적이든 10년만 지나도 생각보다 부질없다고 느끼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가서 정말로 열등감을 느낀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는 게 공부이고 학력이다. 그런데, 그 중요하지 않은 '공부'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들을 놓친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물론 자신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진로에 대한 고민, 학업에 대한 고민, 친구들의 관계에 대한 고민 등등.. 어쩌면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고민을 겪으며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다만 나는 '대학에 가면 생각해라.', '대학 가면 다 나아지고 자유롭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학'이라는 용어를 쓰는 대신 '삶'의 태도에 대해 주문하고 싶다. 어떤 삶을 살고 싶고, 어떤 삶의 태도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반드시 깨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는 삶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잇고 붙일 무언가. 그 삶의 태도를 알았으면 좋겠다.
'깨지지 않은 잔과 같은 삶', '한 점 상처 없는 편안한 마음'이란 존재할 수 없는 허상이다. 모든 삶은 깨어진다. 다만 깨진 조각을 보며 더럽고 위험하다 손가락질할 때도, 누군가는 금실로 엮어질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당신의 절망이 조각난 잔해로 남겨질지, 다른 누구도 구상할 수 없는 당신만의 아름다운 킨츠기로 피어날지 역시 지금, 여기, 그리고 앞으로의 당신에게 달렸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94.
어찌 보면 삶의 아름다움은 잔이나 도자기의 형태가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킨츠기'인가로 나뉘는 것 같다. 부서지고 깨지지 않은 삶은 없으니 말이다. 꼭 금실이 아니어도 된다. 다시 잔이나 도자기의 모양으로 붙지 않아도 된다. 결국 잔이나 도자기로 만들어진 우리들이 세상을 살면서 스스로의 모양으로 다시 만들어지는 게 '삶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앞에서 고민한 아이들에 대한 걱정도 결론은 쓸모없다. 아이들은 깨지고 부서진 것을 붙여가며 나름의 방법으로 살아갈 테니 말이다. 이 걱정 역시 내 것일 뿐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해져 있다. 각자의 삶에 대한 응언과 지지. 그리고 내가 내 깨진 부분을 조각조각 붙여나가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는 것뿐이다.
오늘 내 불안의 한 조각을 붙인 것 같다. 다시 읽어보며 아이들에 대한 걱정이라는 이유로 글을 좀 날카롭게 썼나 고민되어 해당 부분을 삭제할 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내 얼기설기 엮어진 한 조각이니 그냥 두기로 한다.
또 다른 나의 브런치북 '단어 사전' 첫 편에서 내 닉네임인 '예그림'을 설명한 적이 있다. 삶에 대해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던 '예쁜 그림'이 깨지고 부서지며 '예그림'이라는 닉네임이 생겼다고. 처음에는 상처의 흔적이었지만, 지금은 찢어짐 없이 '예쁜 그림'보다 지금의 '예그림'이 좋다. 책과 글로 어설프지만 내 조각들을 엮어가는 지금의 예그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