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오늘 챕터의 제목은 '험난한 세상 한가운데 스스로를 격려하는 방법'이다. 제목도 좋지만 더 좋은 '위로받을 자격이 있는지 곱씹는 당신에게'라는 부제가 있다.
위로받을 자격. 그리고 위로할 자격.
나에게는 생각보다 벗어나기가 쉽지 않은 말이다. 힘듦은 매우 개인적인 영역이고 감정의 영역이므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힘듦의 정도에는 경중이 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위로'라는 단어가 나에게는 긍정적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나에게는 '위로의 말'은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말하는 사람이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뱉는 일'로 느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기억과 경험에 기인해서 굳어진 생각들이기에 더 바뀌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나는 위의 이야기와 관련하여 기억나는 몇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는 '집단 상담'이다. 10년쯤 전에 개인 상담을 받기에는 겁이 나기도 하고 부담스러워서 집단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 본 적이 있다. 분명 그때는 도움이 된 면도 있지만, 지금 와서 되짚어보면 좋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20명 정원으로 시작해서 초반부 빠진 몇 명을 제외하고 15명 내외가 진행되었다. 당연히 서로의 비밀 유지에 대한 안전장치와 함께 시작하므로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사실 디테일한 기억이 잘 나지도 않고...) 회사 생활의 어려움, 진로에 대한 고민,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한 고민을 서로 나누고, 나만 힘든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다양한 어려움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좋았다.
다만, 5회 정도 진행된 상담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것은 이혼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가 컸던 분이 자신의 감정과 이야기를 쏟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쌓여온 힘듦과 감정을 통해 20대였던 내가 겪지 못한 다양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그분의 이야기에 많은 이야기들이 묻혔다. 주 상담자가 조율의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역시 '저 힘듦에 비하면 내 힘듦은 크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저는 이야기를 들으며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라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의 의미도 있었지만, 그 안에서 '힘듦의 경중'이 있고 내 힘듦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기에 그런 부분에서는 옳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저 정도로 불행하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면 괜찮은 거구나'라는 이상한 자기 위안 방식을 배우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 위안 방식도 20대에 한창 힘들 때에는 꽤나 유용하게 쓰였다. '저기 아프리카에 굶어가는 친구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한 거다.', '전쟁을 겪어온 세대에 비하면 지금은 행복한 거다'등의 말들처럼 어딘가 익숙한 듯 잔소리 같은 말이 상대평가와 비교에 익숙한 세대인 내게 어느 정도 유효하게 작용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힘듦의 경중'과 비교의 위안 방식이 머리로는 좋지 않은 구조임을 알면서도 벗어내기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비겁한 방식이지만 실질적으로 그때의 나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위로'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위로'라는 것이 결국 듣는 나의 마음 편한 소리에 불과한 게 아닐까라는 고민을 하게 된 일이 있었다. 첫째는 친한 친구의 이혼 소식이었다. 1년 반 동안 연락이 되지 않다가 만난 친구가 갑작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너무 당황해서 뭔가 흐지부지 지나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만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아직도 그 친구에게는 부채감이 남아있다. 같이 더 화내주고 더 생생히 이야기를 들어줄걸...
둘째는 지인의 아이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지인 역시 나와 아이를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아이를 준비하고 인공수정을 시도하며, 그 과정의 어려움을 한창 토로하던 중이었다. 지인이 어쩌면 너무나도 여상한 목소리로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팠고 출산 후 얼마 안 되어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했다. 숨이 턱 막혔다.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러웠다. 인공수정 힘들다고 징징거릴 때가 아니었는데....
두 지인 모두 성숙한 어른들이어서 듣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도록 신경 써준 것이 느껴졌고,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돌보고 어느 정도 소화한 후 만났다는 것 역시 느껴졌다. 그 상황에서 내가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적어도 적절한 위로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나의 당황의 표현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위로의 말'에 좀 조심스러워졌고, 나의 힘듦을 이야기하는 게 좀 더 줄었다. 각자 어떤 전쟁 같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답답해서 남기는 '위로의 말'이 짐처럼 남지는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과거의 이야기를 쓰고 나니, 나도 '위로'라는 단어를 어느 정도 소화했구나 싶기도 하다. 소화되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글로 풀어내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지금은 그래도 위의 이야기도 조금은 벗어난 것 같다. (완전히는 아닌 것 같지만.)
뜬금없는 맥락의 이야기 같지만,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힘듦'을 인정받을 만한 사건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했다. 내 인생이 너무 평온했기에. 그래서 작가가 되거나 글을 쓰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는 글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쓰고 싶은 에세이에 담기에 내 인생과 경험, 식견이 너무 평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세상에서 인정받을 만한(?) 힘듦을 겪고 나니 오히려 그것이 내 용기 부족에 대한 변명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힘듦을 겪은 사람들이 글을 더 먼저(!) 시작할 뿐이고, 더 진솔하게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스스로 '위로'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도 같은 힘듦의 이야기를 너무 반복 중인가 싶긴 하지만, 아이를 유산한 일이 나의 생각과 경험을 너무 송두리째 바꾸어 놓아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것 역시 출산한 아이를 잃은 지인에 비하면 가벼운 힘듦일지도 모른다는 비교의 생각이 여전히 든다. 그래도 어떤 힘듦이든 힘듦의 경중을 떠나서, 그냥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깨달았다는 점은 꼭 말하고 싶다.
위로마저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따지는 세태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오늘 하루 살아내느라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건네는 것조차 눈치를 본다. 이 정도면 힘들 만하다는 기준이 있다는 생각부터가 함정이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당신은 충분히 수고롭다. 나는 당신의 그 일상적인 수고로움을 위로하고 응원하고 싶다. 적어도 위로와 격려의 자격을 논하지는 않으면 좋겠다. 살아가는 고됨을 감내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이자 예의다.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위 하나도 '실제로 '당신을 위하는 것이면 좋겠다. 확신이 없는 하루하루를 내딛느라 고생하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불안한 다그침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삶을 향해 한 발 더 내디딜 용기를 줄 힘과 위로, 따뜻함이니.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106.
떠나간 아이가 내게 준 가장 큰 가르침. 하루를 살아낸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너무나 고된 일을 했고 수고했다는 것. 위로받을 자격, 위로할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것.
그리고 아이의 이야기를 주변인과 나누면서, 그 말을 들어주는 것만으로, 내가 어렵게 내뱉은 말을 듣고 걱정의 눈빛을 보내준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다는 것을 배웠다. '위로의 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나에게 에너지를 주고 기운을 주려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전해지니까.
그래서 나도 주변 지인들에게 배운 대로 나의 상처를 내가 소화된 부분까지만 최대한 가볍게 이야기하게 된다. 이야기 자체가 무거울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내 아픔을 함께 나누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내 이야기를 나누어서 들어주는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서. 그들의 힘과 에너지를 받고 싶어 말하면서도 그들에게 짐이 되지는 않길 바라는 약간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위로받을 자격도, 위로할 자격도 누구에게나 있다. 위로를 잘 받을 필요도, 위로를 잘할 필요도 없다. 그 이야기를 말하고 들으며 나누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으니. 그리고 이야기의 경중에 상관없이 힘을 내고 싶고, 힘냈으면 좋겠다는 그 마음은 하나일 테니.
내 글 역시 어쩌면 내가 내 아픔을 소화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읽어주시는 분들이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글을 읽는 만큼의 그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에너지를 받는다. 그래서 글의 마지막에는 항상 감사하고, 읽어주신 분들을 위한 평화와 평안을 기원하게 된다. 이것만으로 나의 삶에 대한, 당신의 삶에 대한 서로의 위로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 모두의 평화와 평안을 기원하며. 오늘의 살아냄을 위로하고 응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