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증오하고 원망하지도 용서하지도 말고

느리게 읽기 1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by 예그림

지난 글에도 썼지만, 이번 장에서 말하는 것들은 '탈융합'이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언어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것. 융합에서 벗어나는 것. 어쩌면 무언가와 결합하고 함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벗어나는 것이다. 특히 말이라는 것이 한번 상처 입은 장면은 순간이고, 그 순간의 공기와 냄새까지도 기억나는데, 벗어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고 혹은 평생을 그 말에 묶이기도 하니 말이다.

오늘 챕터의 제목은 '상처받은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면 - 용서하라는 말에 더 괴로운 당신에게'이다.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한동안 답을 찾아 헤매기도 했던 질문이다. 오늘 챕터의 핵심이며, 글 제목에 대한 답은 이것이다. '철저히 상관 없어지는 것'. 대상과 상관없어지는 것. 그리고 '나를 용서하는 것'


용서하는 것은 잘 되지 않는다. 용서하라는 말에 마음의 평화보다는 분노를 얻게 되기 쉽다. 나는 '용서'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면 자동으로 영화 '밀양'이 떠오른다. 실제 영화를 보지도 못했지만,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며 기사에 실린 한 줄의 줄거리로도 정말 충격적이었다. '나를 고통받게 한 범죄자가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니. 나는 용서한 적이 없는데..'

이러한 인식이 너무 강하다 보니 나에게 '용서'는 또 다른 불가능의 단어 중 하나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나를 상처 주었던 사람들을 용서한 경우는 솔직히 없다. 하지만, 난 그들에게서 꽤나 벗어났다고 생각한다. 오늘도 책에 나온 이야기처럼 상처와 '철저히 상관없어지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상처받은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흔히 하기 쉬운 것은 다른 무언가를 붙드는 것이다.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무언가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는 다른 무언가에 매달리게 되기 쉽다. 그 고통이 너무 크니까 빠르게 다른 좋은 것, 괜찮은 것, 나를 꺼내줄 것에게 매달리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그 매달린 것이 나의 동아줄이 되어줄 때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지푸라기'와 같을 뿐이다.

진짜 '동아줄'을 만나 벗어나고 성공한 사례가 적을까? 인간은 누구나 홀로서야 하기 때문이다.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랑에 상처받으면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말은 사랑에 '상처받자마자' 다른 사랑을 만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잔뜩 상처받아 피 흘리는 마음에는 단단히 상처받은 마음에는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도 상처받지 않을까 잔뜩 가시가 올라있기에 만남이 잘 이어지기도 쉽지 않다. 그리고 소름 돋게 헤어지자마자 바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경우, 소름 돋게 비슷한 사람을 만나고 다시 유사한 상처를 받기 쉽다. 그 구조를 나 스스로 벗어나지 못하면, 무의식적으로 비슷한 구조를 반복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상처받은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동아줄이 아니다. 나 스스로 먼저 충분히 슬퍼하는 것이 우선이다. 우리는 슬픈 일이 생기면 자꾸 빨리 털어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안, 분노, 고통, 슬픔을 회피하고 싶은 것 역시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자연스러운 감정들을 덮어버리고 외면하는 순간, 그 감정들은 이자를 붙여 돌아온다. 특히 내가 자주 쓰는 감정으로 변질되어서 원래 형태가 무언지도 모르게 변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까칠이, 소심이'라는 캐릭터로 감정이 표현된다. 그 영화의 교훈은 모든 감정이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 느껴야 할 감정을 충분히 느껴야 한다는 말은 낯설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지만, '느끼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느낀 감정을 외면하기만 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충분히 그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자신에게 익숙한 다른 감정으로 변질되는' 부작용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감정이 '기쁨'인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보통은 '슬픔, 분노, 까칠함, 소심함' 등이 아닐까. 내가 느낀 그 감정과 슬픔, 고통을 충분히 애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익숙한 감정으로 치환하여 사용한다. 그리고 원 감정이 흐려져버리기 때문에 내가 내 감정을 잃어버리고, 나쁜 감정으로만 남는다.

일례로, 나의 주된 감정은 '슬픔'이다. 나는 억울할 때 슬프고, 아플 때 슬프다. 속상할 때도, 부끄러울 때도, 불안할 때도 슬프다. 그런데 내 남편의 주된 감정은 '분노'이다. 같은 상황에서 남편은 항상 분노한다. 남편이 화를 낼 때면 나는 생각한다. '아, 남편이 지금 억울해서 화를 내는구나.', '남편이 지금 부끄러워서 화를 내는구나'하고. 내 감정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외면하면 어느 순간 내가 가장 싫어하는 그 감정만 남아서 나를 지배한다. 원래 감정은 온데간데없이.

그래서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긴 하지만 다른 책에서 읽은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고통과 슬픔과 상처가 있을 때는 충분한 '애도 기간'을 가져야 한다. '애도'라고 하면 죽은 사람에 대한 슬픔과 명복을 비는 행위가 먼저 생각나지만, 일상 속 상처도 그런 것처럼 애도하라는 것이다. 떠나간 사람을 슬퍼하듯이,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는 것. 상처받아 부서지고 일부가 무너져 내린 내 마음을 애도하는 것.

'애도기간'이라는 용어를 소개하는 이유는 언어에서 벗어나는 '탈융합'도 중요하지만, 무조건 모든 언어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주는 새로운 언어로 재정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어 정의가 머릿속에 들어오면 우리는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애도 기간'이 오늘 글의 제목인 '철저히 상관없어지는 것'이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애도하는 것,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것. 모두 중심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내가 상처받은 장면을 곱씹고, 대상을 증오하고, 복수심을 불태우고. 모두 나에게 상처 준 그 대상이 내 마음속 일부나 혹은 전부를 차지한다. 상대도 나만큼의 고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사실 진정한 목적은 내가 고통받지 않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 생각에서 어서 벗어나는 것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에게 가장 먼저 집중해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나에게 상처 준 대상이 내 마음과 일상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을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가 나중에 천벌을 받고 아팠으면 좋겠다고 말한 적도 있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얼른 내 마음을 그 대상으로부터 온전한 내 것으로 가지고 오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 흘리고 부서지고 무너진 내 마음을 먼저 돌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을 우선하다 보면 그 상황이 다시 보인다. 지금은 5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지만, 내 마음이 무너진 그 상황이 만들어진 것에는 서투른 나의 잘못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내 잘못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하면 안 되었었다. 그러니 나는 그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나에게 부당하게 대하는 것을 참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나 혹은 다른 대상이 나에게 같은 일을 한다면 나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라고 내 마음을 단속한다.

지금은 시간이 오래 지났기에 그에 대한 연민이 일부 올라오기도 한다. 그도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다른 곳에서 받은 상처가 그냥 운 나쁘게 나에게 터져 나온 것이라는 이해도 일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운 나쁘고 서투른 나 자신을 용서했고 그는 용서하지 않았다.

사실 그를 용서할 필요가 없는 것에 가깝다. 그는 그의 삶을 살고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뿐. 나는 그와 '철저히 상관없는' 삶을 살아갈 것이니까. 가끔 억울함과 분노가 다시 치밀면, 미숙해서 나 자신을 방어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하며, 다시 한번 내 마음을 다질 것이다. 그리고 그가 혹은 타인이 유사한 방식으로 나의 삶에 다시 침범한다면 최선의 방어와, 필요하다면 공격도 할 것이라고 다짐할 뿐이다.


이게 '정답'인지는 솔직히 모르지만, 이게 현재까지 내가 내놓은 최선의 '해답'이다. 그 대상은 이미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도 않는 대상을 용서할 수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방어하고 공격하지 못했던 나에 대한 용서, 상처받았다는 이유로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소 소홀히 했던 나에 대한 용서, 나를 믿어주지 않았던 나에 대한 용서.


'용서'가 꼭 상대를 향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중요하지도 않은 그 나쁜 상대는 버려두고 상처받은 나를 먼저 바라보고 용서해 주자. 어쩌면 나에 대한 용서가 더 힘들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용서를 구할 수 있으니까. 절절하게 기억을 반복하며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나를 먼저 바라보는 것. 그것으로 시작했으면 좋겠다.


모든 글이 그렇지만 이것 역시 자기 다짐이다. 나 역시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오늘 글을 쓰면서 그 일부를 또 용서한다. 나를 용서할 부분이 점점 줄어들어 간다는 것에 감사하며..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인용글로 마무리한다.



보란 듯이 잘 살자는 것이 아니고, 무리해서 애써 용서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내일도 당신의 하루가 열릴 테니, 그 하루가 그 아픈 기억과는 철저히 상관없는 일상이기를 기도한다. 그 아픔이 있기 훨씬 오래전부터 일상을 늘 함께해온 당신이 아끼는 것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상처를 바라보는 대신 예전처럼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다.

-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이두형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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