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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유진 May 04. 2021

난민은 왜 더러운 말이 되었을까

네, 인권충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공통점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 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를 수 있었다면 모두 억만장자의 자녀로 태어나느라고 줄을 서고 있을 테지.


우리 원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과반수 이상은 난민이다. 내전에 의해서든 다른 정치적 탄압에 의해서든, 살기 위해서는 삶의 터전을 떠나 타지에서 평생 객으로 사는 운명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떠나온 고향에 대해서는 어름풋한 기억이 있을 뿐 태국어를 하고 태국어 문자를 쓰며 태국 음식을 즐겨 먹는 영락없는 태국인이지만, 태국인은 아니다. 네 개 대륙을 가로지르며 살아온 나 역시, 타지에서는 외국인이요 고향에서는 검머외 취급을 왕왕 당하는 영원한 이방인 처지인지라, 때때로 몰려오는 소속되지 않음에 따른 소외감 같은 그 공허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조국에 돌아오면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완전한 소속원으로 인정받고 보호받는 나와는 달리, 우리 아이들은 부모님의 조국에서나 지금의 조국에서나 정서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완전히 배제당하고 있다. 대통령이나 의사선생님이 되는 것은 차치하고, 오토바이 한 대도 자기 이름으로 소유할 수 없는 인생. 알뜰살뜰 모은 재산도 명의를 빌린 태국인이 변심하여 가로채면 대처할 방법도 없다. 본디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으니 말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더디어지는 까닭은 온라인에서 난민의 'ㄴ' 자만 들어도 화가 나는 분들의 마음이 불편한 이유와 비슷한 것일 테다. 


(1) 난민 아이들이 자라나서 일으킬 범죄가 두려워서


아이들에게 체류의 권리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오히려 범죄를 예방하는 길이 될 것이다. 강제 추방 후 재입국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모니터링 할 것이 아니라면, 도망온 이들은 여간해서는 스스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차피 눌러 살 거라면, 교육도 받지 못하고 재산권도 없이 하루살이로 인생을 살아갈수록 옳지 않은 길로 빠질 가능성이 높으니 기본적인 권리를 제공하는 편이 낫다. 내 집, 내 차 마련의 꿈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희망의 부재 속에서 자라난다면, 그 누구라도 내일은 없는 이처럼 살지 않을까? 


(2) 난민 아이들이 자라나서 친척들을 초청할까봐


우리나라를 비롯해 여러 나라, 심지어 동남아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인구 고령화를 감안했을 때 반드시 단점이라고 보기도 힘들지만, 원하지 않는다면 명확하게 재단된 규제로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문제이다.


(3) 난민 아이들에게 쓰이는 세금이 아까워서


난민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단한 복지보다는 기회의 평등이다. 과도한 복지는 자기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사람을 길러 낼 뿐이다. 보육시설에서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자라나는 아이들이기에, 독립 후에도 남의 도움을 기대하는 마음, 소위 [거지근성]을 근절하고자 원에서는 포인트 제도를 통해 설거지 하기, 화장실 청소 등 아이들이 한 노동만큼 포인트를 부여해서 포인트를 통해 생필품이나 과자를 사도록 하고, 밖에 나갈 때에는 현금으로 환산할 수 있도록 한다. 포인트 제도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경험상 아이들은 정부에서 무언가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이들처럼 열심히 살고 성공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 즉 이동의 자유, 재산 소유의 자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권리 등을 원할 뿐이다. 


뉴스에서 한 집단으로 뭉뚱그려져 듣는 [난민] 이라는 단어는 그 뒤에 있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인간성을 훼손시킨다. 그래서 다들 이들에 대해 쉽게 오해하고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이야기를 굳이 글로 남기는 이유 역시, 몇 명이나 될 지 모르겠지만 혹시 나의 글을 읽어 줄 독자에게 헤드라인 뒤에 숨겨져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 주고 싶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태어나 보았더니, 우연히 구차한 운명이던, 그러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인간의 이야기 말이다. 


옆 동네 미얀마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지금도 난민이 되어 도망치고 있는 소수민족 아이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소외된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인생들 하나 하나를 용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책임지게 될까봐 겁내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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