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이 스쿨버스를 산 이야기
스쿨버스를 바꾸고 싶어요.
원장 선생님의 답변을 듣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고물 덩어리 차를 바꾸는 것은 나의 염원이기도 했지만, 막상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차를 사자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태국은 다른 개발도상국들이 흔히 그렇듯 차값이 매우 비싼 편이다. (동남아시아나 남미의 대도시에서 괜히 아침마다 오토바이의 홍수가 보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 보육원 가까이에는 우리나라로 치면 임대아파트 개념의 주택가가 있는데, 지금은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분양 당시에는 집 한 채당 3천만 원 정도의 가격이었다. 이곳에서는 보편적인 세단 한 대의 가격이 3천만 원 정도이다. 집 한 채와 가격이 맞먹는 것이다.
30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을 꽉꽉 태우고 가야 하니 트럭이어야 할 것이다. 가격이 세단의 1.5배쯤은 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만만치 않았다.
다음 모임에서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있는 멤버들에게 원장님의 바람을 그대로 전했다. 모두 비슷한 반응이었다. 돕고 싶지만, 생각보다 큰 일이었기에, 쉬운 출구가 보이지 않는 까닭이었다. "크라우드펀딩이라도 해야 하나..." 누군가가 중얼였다.
그 후 며칠 동안 gofundme, 네이버 해피빈 같은 곳들을 기웃거리며 다른 이들은 어떻게 펀딩을 하는지 구경했지만, 과연 몇천만 원에 육박하는 돈을 이런 식으로 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만 남았다. 모금의 목적이 차 한 대 구매이다 보니 목표액을 달성하지 못했을 때 모금된 돈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도 난감했고, 우리는 법인이 아닌 범인 대여섯 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요즘 같은 불신의 시대에 과연 사람들이 선뜻 모금에 참여할 것 같지도 않았다.
때로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여럿의 힘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평범한 개인이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니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즈음에 새벽기도에서 만난, 이 우왕좌왕한 모임의 초창기 멤버인 언니에게 차 한 잔 마시자는 전화가 왔다. 퇴근하는 길에 커피숍에서 만난 언니는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작년에 보너스로 3천만 원 정도를 받았는데, 기도할 때 내 돈이 아니라 보육원을 위해 사용하라는 마음이 들었어. 하지만 모기지도 있고, 나도 사람인지라... 차값으로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마음 바뀌기 전에 먼저 이야기하는 거야."
이상하게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좋은 차를 찾지 못해서 그녀의 헌신이 수포로 돌아가고 마음에 상처가 될까 두려움이 앞섰다.
우리의 다음번 태국 여행의 마지막을 이틀 앞두고, 우리는 원장님의 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치앙라이 주에 있는 중고차 딜러샵을 한 번 쭉 훑을 예정이었다. 첫 번째로 들린 딜러에는 덤프트럭들은 많았지만 아이들이 탈 수 있는 일반 트럭은 없었다. 두 번째 딜러에도 트럭은 덤프트럭뿐이었다. 세 번째 딜러에도 역시 - 덤프트럭만 한 가득이었다.
차창 밖으로 수많은 트럭들이 지나갔다. 아, 이곳에 이렇게 트럭이 많았던가! 그런데 한 대도 찾지 못하다니. 들뜬 마음은 정오가 지나자 조급함으로 바뀌었고, 오후 세 시 정도를 넘기자 체념 비슷한 감정이 되어갔다. 어느덧 우리는 치앙라이를 넘어 파야오 주를 돌파한 상태였고, 곧 그 옆 주인 람빵 주로 입성할 것 같았다. 여전히 딜러는 보이지 않았다.
"잠깐 머리를 식혀 가자. 원장님 좀 봐. 거의 정신력으로 밟고 계셔."
언니의 말을 듣고 앞을 보자 피곤한 얼굴에 오기가 깃든 눈빛을 하고 있는 원장님과 거의 기절 직전 상태의 사모님이 그제야 보였다. 다음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연유를 잔뜩 넣은 태국식 커피를 원샷하며 너나 할 것 없이 먼산을 쳐다보았다.
세상에서 포기하는 것이 제일 싫은 부류인 나는 오늘은 아닌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자는 이야기를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조금만 더 가면 트럭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떨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원장님과 사모님도 우리에게 미안해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차를 찾고 싶은 간절함에서였는지 돌아가자는 말씀을 꺼내지 않으셨다. 다행히 동행한 이들은 나보다 이성적인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했다.
돌아오는 길에 I 모 자동차 회사의 딜러쉽이 있었는데, 누군가 새 차 시세나 한 번 알아보자고 해서, 이렇게 중고시장에 매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얼마나 더 돈을 모아야 새 차를 살 수 있을지 시장조사 차원에서 들어갔다. 차를 세우고 한참 기다리니 어린 종업원이 와서 쭈뼛거리며 오늘은 판매자격이 있는 직원이 자리를 비워 안내가 불가능하니 연락처를 남겨 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연락처를 남기며 냉수 한 잔은 얻어먹었지만, 시세 확인도 실패했고, 서운했던 마음을 그 딜러쉽의 영업의지 부족을 탓하는 것으로 풀었다.
첫 딜러쉽에서 시세 확인에 실패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두 번째 딜러쉽을 찾았다. 담당 세일즈맨이 엄청난 환대를 해 주며 시세 안내를 해 주었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탈 수 있도록 커버까지 씌우면 4천만 원이 조금 넘어갔다. 그는 우리 보육원을 알고 있으며, 식사봉사를 온 적이 있다고 했다. "여기구나!" 다시 마음이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차가 수시로 고장 나서 통학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최대한 어필했다. 그는 내일 아침에 라인으로 최종 가격을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트럭을 꼭 사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고 늘 우리가 생각했던 때에 원하는 것을 이룰 수는 없지만, 가능하다면 꼭 내일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연식이 30년 가까이 되고 보험처리도 되지 않는 삐걱거리는 트럭을 더 이상 태울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식사를 마치자, [띵] 하고 원장님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제 우리를 환대해 준 딜러였다. 그가 보내온 메시지를 다 함께 확인한 후 우리는 모두 황망해졌다. 오히려 어제 구두로 안내받은 것보다 비싼,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외국인이어서 그런 걸까,부터 온갖 생각이 다 들었고 허탈했다. 저녁이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그때 누군가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어제 자리를 비웠다던 첫 번째 딜러쉽의 세일즈맨이었다. 그는 괜찮다면 지금 보육원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나는 체념한 상태여서 부담 없이 오시려면 오시라고 했다.
막상 그가 보육원에 들어서자 투지 같은 것이 생겼다. 이제 몇 시간 남지 않았고 포기한 상태인데, 이판사판이었다. 우리는 원탁에 함께 앉아 가격 흥정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설득하고, 나중에는 빌었다. 나의 짧은 태국어 실력이 간절함에 폭발하는 것을 경험하였다. 결국 나와 동행했던 일행 한 명이 조금 더 돈을 보태어, 우리의 최종 예산을 솔직하게 제시하였다. 정말 이것밖에 없으니 뺄 수 있는 스펙은 빼어서 최대한으로 맞추어 달라고.
그는 밖으로 나가 5분 정도 전화통화를 하고 다시 돌아와서 어두운 표정으로 그 가격에는 정말 불가능하다고 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방 안에서 놀고 있던 네 살 배기들이 쪼르르 몰려와 [누나, 왜 울어?] [누나, 울지 마!]를 반복했고, 웬 외국 처자가 와서 가격을 깎아 달라고 떼를 쓰다가 오열을 하다니. 내가 세일즈맨이라도 생각지 못한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괴로운 표정을 짓고는 잠시 전화통화를 하겠다고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리곤 20분을 통화했다.
20분 동안 나는 물을 마시고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여전히 볼썽사나운 모습이었다. 흥정 하나도 이성적으로 하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고, 혹시라도 그가 통화를 마치고 좋은 소식을 들려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칠 수 없었다. 다행이었던 것은 옆에서 원장님도 함께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혼자 망가지는 것보다는 함께 망가지는 것이 낫다.)
20분 후에 그가 돌아와서 미소를 짓더니, 기적 같은 이야기를 했다.
가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고.
그 말을 듣고 우리는 다시 눈물이 터져 버렸고, 그분도 함께 기뻐하여 주셨다. 나중에 최종 가격을 보니, 처음에 제시받은 가격에서 무려 500만 원 정도를 제한 금액이었다.
그렇게 벌게진 눈으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 위에서 문득, 24살의 내가 가졌던 꿈이 생각났다. 전기를 까는 것, 직업교육을 하는 것, 고물 덩어리 스쿨버스를 갈아치우는 것...
어느덧 마법처럼 모든 것들이 이루어져 있었다. 위대한 사람을 초빙해서도, 큰 단체의 스폰서를 받아서도 가 아니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또 평범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동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이 경험은 기부와 봉사에 대한 나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어떤 단체에게, 저명한 인사에게, 책임을 묻고 기다리기 전에, 작고 평범한 범인일지라도 내가 행동하면 그만큼의, 아니 내가 행동한 것의 몇 배의 결과가, 돌아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20:80의 법칙에 대해 모든 사람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80%의 평범한 이들의 위대함을 믿는다. 그 작은 희생들이 합해지면 평범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