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emption Song - 음악으로 이룬 영혼의 자유와 구원
2023년 6월 12일 포르토마린 - 팔라스 데 레이 24.8km
원치 않은 늦잠에서 일어나 부리나케 출발할 때만 해도 희뿌연 구름이 잔뜩 킨 정도였다. 드문드문 과객만이 지나치는 광장은 8시가 넘어도 햇볕 한 점 없어 초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을씨년했다. 마을이 들어선 산마루에서 내려와 호숫가 작은 다리를 건너 산 로케 언덕으로 접어들었다. 쾌청한 대기 위에 영롱하게 피어난 아지랑이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시간이 멈춘 분위기를 자아내던 어제의 포르토마린과 달리 오스 몬테스Os Montes의 아침은 고요히 넘실거리는 박무薄霧가 세상의 경계를 지우며 만물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옅은 안개가 지어낸, 피안이 보일 듯 말 듯한 미경迷境은 가까운 것조차 멀리 있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뚜렷하던 사물의 윤곽들이 흐릿하게 무너지니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한다. 가녀린 빛줄기는 안갯속에서 희미하게 퍼져 따뜻하면서도 차가운 질감으로 다가온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순간이었다. 신묘한 정적과 쓸쓸함이 깃든 까미노에서 불현듯 북한강 두물머리의 물줄기를 은은하게 휘감는 새벽녘 은빛 물안개가 겹쳐졌다. 어디선가 가수 정태춘의 ‘북한강에서(1984년)’의 한 구절이 들리는 것 같았다. 산과 산들이 얘기하는, 나무와 새들이 얘기하는 그 신비한 소리가.
이슬기 머금은 숲이 깊어질수록 농무濃霧로 변한 짙은 장막이 더욱 깊은 침묵을 뿜어냈다. 기다란 나뭇가지들이 희미한 실루엣으로 안개를 뚫고 다가와 나를 마중했다. 가야 할 바는 명확하지만 안개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것인지, 잃으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마음으로 발을 내디뎠다. 걸음을 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작았으되, 뜻 모를 울림은 컸다. 안개 너머 펼쳐져 있을 미지의 세계가 나를 애타게 기다린다는 생각을 하니 살아 있음을 자각했다. 앞선 이에 의지하며 홀로 걷는 길은 외롭되 그 고요함 속에서 평온이 깃들었다. 흘러가도 또 오는 시간과 언제나 새로운 그 까미노에 발을 떼어 놓으니 안개가 천천히 걷혀갔다. ‘북한강에서’의 마지막 소절처럼.
10시 넘어 농담이 어우러진 몽환진이 풀리자 차츰 미경이 사라졌다. 운무에 갇혀 답답하던 차에 주위가 선명해지고 뜨거운 태양이 성큼 다가섰다. 오스피탈 데 크루스Hospital de Cruz에 도착했다. 목적지까지 절반이 남았다. 도로변에 위치한 바, 타베르나 도 까미노Taberna do Camiño는 휴식을 취하는 순례자들로 붐볐다. 테이블은 이미 만석. 빈 의자라도 구하려 기웃거리는데 젬마 님이 반갑게 손짓하며 불렀다. 젬마 님 옆에는 사리아부터 동행한 두 딸이 함께 앉아 있었다.
순례를 극구 마다했음에도 엄마의 강권에 하는 수 없이 까미노에 왔다는 그녀들의 표정이 의외로 밝았다. 억지로 웃는 썩소가 아닌 해맑은 미소가 넘쳐나 청춘의 풋풋한 향내가 물씬했다. 당초 예상보다 걸을 만할 뿐더러 순례 후에 있을 엄마와의 유럽 여행이 기대됐을 것이다. 어쨌건 그녀들의 휴가가 블루 서머타임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Eddie Cochran은 ‘Summertime Blues(73위)’에서 몰아 닥친 업무 때문에 연인과 벼르고 별렀던 여름휴가를 미루고 속 터지게 일하는 청춘들의 불만을 그렸다. 휴가 가지 못해 안달하는 젊음을 이해하지 못 하는 심드렁한 기성세대를 불평하는 심정이 공감된다.
두 시간 만에 쉬는 터라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아래일망정 황송했다. 시원한 주스가 당겨 삼 모녀 몫까지 주문하려는데 이미 마셨다면서 사양했다. 큰 딸이 자리에 앉길 강권하더니 내가 마실 오렌지 주스를 사왔다. 젬마 님에게 한 턱 내라는 누나의 당부를 또 이행하지 못했다. 남매가 번갈아 신세를 져 미안했다. 뭐라도 보답해야 한다는 강박이 일었다. 누나 근황을 얘기하다가 산티아고 숙소로 화제가 이어졌다. 3인실이 있는 숙소가 없어 호텔 예약을 고민하길래 세미나리오 메나르 알베르게Albergue Seminario Menor를 추천했다. 연박도 가능하고 머물기 편한 곳이다. 단점이라면 대성당까지 도보로 15분이 걸린다는 것. 다들 만족하여 인터넷 예약을 거들었다. 조금 도움된 거 같아 마음이 가벼웠다. 따스한 햇살을 만끽하는 모녀들에게 세미나리오 메나르에서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먼저 일어섰다.
바에 인접한 도로를 건너 왕복 1차선 차도 부근 이정표에서 아르헨티나 부부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자연스럽게 태닝 된 구릿빛 피부가 어울리는 중년의 훈남훈녀다. 또 보자는 답례를 했다. 구면의 미국인 모녀도 만났다. 가벼운 미소와 짧은 안부를 주고받았다. 까미노에서 만난 순례자들을 재회하는 감정은 언제나 유쾌하고 기껍다. 만날수록 오해와 감정의 골이 깊어진 사 총사만 빼고. 거자필반이 반가운 이유는 산티아고로 이어진 한줄기 까미노를 서진하는 공동의 목표에서 비롯된 묘한 동질감에 있는 것 같다. 간혹 무거운 행장에 짓눌리거나 기력이 달려 지친 모습이 역력한 분들이 안쓰럽고 애처로워도 최소한 Roy Orbison의 ‘Crying(69위)’에서 묘사한 헤어진 연인을 우연히 조우할 때의 쓰라린 애잔함과는 거리가 멀다.
만남의 기쁨과 한담의 즐거움은 어느 할머니 가족 앞에서 숙연해졌다. 한쪽 다리에 장애가 있는 중년 남성이 연로한 할머니를 태운 휠체어를 밀며 불편한 걸음에도 기꺼이 산티아고로 향하고 있었다. 모자지간인 듯한 이 분들은 어디서부터, 어떤 사연으로 까미노에 오를 용기를 냈을 지 궁금했다. 험한 산길을 넘을 순 없었을 테니 사리아에서 시작했을까? 아니면 생장부터 자전거가 다니는 길을 따라 프랑스 루트를 종주한 걸까? 이 분들에게서 순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성경에 문외한일지라도 누가복음 10장 25~37절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생각났다. 강도를 만나 심하게 다친 유대인이 가여워 그를 정성껏 돌본 사마리아인은 진정한 사랑과 자비의 표상이다. 고대 중동에서 사회적 약자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의 선행처럼 불편한 육신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거룩한 순례를 이어가는 두 모자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사랑과 궁휼, 그로 말미암은 구원의 참뜻을 되새겨준다.
구원. 듣기만 해도 거룩한 단어. 때마침 어제 자유의 종을 보며 듣고 싶었던 ‘Redemption song(66위)’을 오늘 듣게 되었다. 이 노래는 Bob Marley의 음악 인생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웨일러스 밴드의 연주와 레게 창법을 배제한 채 밥이 어쿠스틱 기타를 직접 독주하며 담담하게 부른다. 어쩌면 이 곡은 자신을 위로한 노래였는지 모른다. 발톱에 생긴 암이 악화돼 회복되기 힘든 처지를 처연하게 그리려 한 건 아닐런지. 노래는 정신적 해방과 자기 구원을 강조한다. 특히 ‘정신적 속박에서 자신을 해방시켜라, 오직 우리들 스스로가 유일하게 자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구절은 작게는 암으로부터 자신의 삶과 죽음을 성찰하고, 음악을 통해 영혼의 자유와 구원을 염원하면서, 크게는 자메이카 식민지 역사와 노예 제도의 유산을 딛고 일어나 개인과 사회의 자유를 추구하라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아낸다. 밥 말리의 유작 중에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에 와닿는 곡이다. 공식 뮤직비디오는 프랑스 작가 옥타브 마샬과 테오 드 구엘츨이 연출했다. 2,474개의 흑백 스케치 원화가 키네토스코프처럼 연속적으로 재생되는 뮤직 비디오를 꼭 관람하길 추천한다.
https://youtu.be/yv5xonFSC4c?si=nuz2zRl5SS3KGE6n
팔라스 데 레이를 5km 앞둔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알베르게를 겸한 레스토랑, 아 파소 베 포르미가A Paso de Formiga의 마당에 깔린 테이블을 가득 채운 순례자들이 식욕을 자극한 탓이다. 참치 보카디요를 시켰다. 한국에선 써브웨이 스타일의 샌드위치를 그다지 즐기지 않았는데 시장이 반찬인 건지 여기 보카디요는 희한하게도 내 입맛을 자극한다. 그리 화려하지 않을 순례자의 먹거리로 제 격이었다.
숙소에 도착했다. 누나에게 점심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물었다. 아침에 챙겨 온 토마토와 마늘을 올리브 오일에 둘러 만든 볶음밥을 맛나게 들었단다. 김치만 곁들이면 금상첨화일 정도로 그간의 어떤 음식보다 훌륭했다는 자평이다. 창천 하늘에 바람마저 솔찬히 불어 모처럼에 빨래를 햇볕에 말렸다. 구름이 조금씩 짙어지고 빠르게 흘러 혹시나 싶어 출입문과 가까운 마당에 널었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길래 마당에 나가기 무섭게 비가 퍼붓는다. 건조대를 통째로 들어 1층 응접실 한쪽에 들여 놨다. 비 올지 모른다는 머피의 법칙대로 쓸데없는 기우가 우리를 원치 않는 방향으로 이끈 것 같다.
머피의 법칙 같은 징크스는 일종의 미신이다.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때 미신이 파고든다. 숫자 13, 깨진 거울, 더럽혀진 손과 얼굴, 기타 불길하거나 재수 없다 여기는 행동들. 곤경에 빠졌다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미신을 믿는 건 어리석다. Stevie Wonder는 ‘Super stition(74위)’에서 미신에 의지하지 말자고 했다. 비단 미신과 징크스, 샤머니즘만이 아니라 교리를 맹신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작년 이 길을 걸을 때는 썩 와닿지 않았는데 무속이 국정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작금에 이르러 이 곡의 진면모가 구구절절 가슴에 박혀 온다.
마을에서 맛있기로 유명한 파스타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수용인원이 14명 밖에 안돼 대기자가 많았다. 한참을 기다릴 것 같아 망설였는데 아담한 분위기에 반한 누나 의견을 따랐다. 1시간 가까이 쏟아지는 비 속에서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떨었다. 기다림에 지친 탓에 먹을 만했으나 구글 리뷰엔 미치지 못했다. 부족하다 여겨진 게 내가 선호하는 동그란 스파게티가 아닌 얇고 넓적한 탈리아 텔레 때문인지 의심스러웠다. 누나에게 물으니 시판 소스가 훌륭한 맛이란 걸 느꼈다는 대답에서 면 종류 때문은 아니라 결론지었다.
대기하던 중에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The Beatles의 ‘She loves you(64위)’를 들었다. 이 노래는 사랑의 중재를 다룬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리다 오해가 깊어진다. 어느 지인이 연인과 소원해진 남자에게 그녀가 아직도 너를 사랑하니 그녀에게 냉큼 사과하라 조언한다. 순례 막바지에 내가 삐뚤어진 방식으로 불만을 쏟아내 못마땅했을 텐데 누나는 어릴 적 귀여웠던 동생을 떠올리며 매번 이해하려 애썼을 것이다. 누나의 노력 덕분에 악화될 수 있었을 갈등의 골이 가벼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오해와 반목, 갈등을 중재하는 건 연인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정치도 그렇다. 노예제를 둘러싼 갈등이 격해진 끝에 급기야 내전으로 치달은 남북전쟁이 좋은 사례다. 당시 미국엔 남북 모두가 존중하는 위인이 있었다. 도덕적 리더쉽과 남북 화해 의지가 돋보인 에이브러햄 링컨은 말할 것 없다. 남부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E. 리 장군의 지고한 품성은 북부의 귀감이었다. 남북 전쟁을 승리로 이끈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남부에 관용을 베풀고 일체의 보복 없이 남부 재건을 도와 국가 통합에 일조했다. 1,2차 국공 내전 끝에 두 체제로 나뉜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지도부들은 쑨원과 루쉰을 공히 존경했다. 공산당은 공산주의에 대립한 후스가 문학과 학문 발전에 공헌한 점을 크게 인정했으며 국민당은 초대 공산당 총서기 천두슈의 초창기 개혁정신과 민주주의 사상을 존중했다.
정치적 격변기마다 상대 진영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와 증오가 점입가경의 경지에 이른 지 이미 오래인 한국 사회에도 중재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양 극단에서 갈등과 증오를 조장하는 세력들이 득세를 하는 탓에 이를 중재하려는 명망 있는 인사를 찾기 힘들다. 아니 모두가 인정할 만한 존경받는 인물을 아무리 꼽아봐도 마땅한 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사실상 치유가 불가능한 것 같아 매우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