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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설 Feb 15. 2023

어떤 장례식

고인과 조문객이 모두 fun 한 이별모임

친한 직장 후배가 춘당 어르신의 부고를 전해왔다. 후배 자당께서 세상을 멀리 하신 지 2년 남짓 되었다. 양친을 모두 잃은 상심이 얼마나 클까 걱정이 앞섰다. 선대인 살아생전에 후배가 어르신을 많이 존경하고 사랑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재능을 부모님들께서 물려주셨다며 기회 있을 때마다 진심 어리게 감사해했다.


때늦게 코로나에 확진되어 요즘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다. 그래도 다행히 2주 전에 격리에서 해제된 만큼 조문드리는데 제약이 없어 부음을 듣자마자 빈소로 달려갔다. 일원동에 소재한 대형 의료원에 부설된 곳이다. 후배 일가친척이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형제도 3남매. 아주 많은 편이라 할 수 없는데 특실로 잡았길래 후배와 형제들이 사회생활을 나름 잘 해왔구나 싶었다. 평소 인심을 베풀고 인간관계를 폭넓게 했으리라 어림짐작을 했다.


접수대에서 방명록에 이름을 남기고 조의금을 전달했다. 분향실 입구 쪽으로 조문드리려는 문상객들이 줄 서서 대기 중이었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돌아가신 후배 부모님들을 기렸다. 회사 생활을 같이 했던 20년 전에 이런저런 집안 행사 때 네댓 번 뵈었던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떠올려봤다. 이내 차례가 되어 분향실에 들어가 조문 인사를 하기 위해 분향대 앞에 자리를 잡은 후에 영정을 뵈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선대인의 영정이 아닌 선대부인의 영정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닌가? 크게 당황했으나 상주들이나 상조회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순간 어찌할 바를 몰라 엉거주춤한 얼음이 되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삼배를 올렸다.


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정말로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나도 모르게 삼배를 드린 다음에 평소와 달리 영정 앞에 다시 무릎 꿇어 향 하나를 분향로에 꽂아드렸다. 바로 고개를 들어 영정을 바라봤는데 사진 속 어머님께서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는 게 아닌가? 갑자기 먹먹함이 몰려왔다. 일어나 영정 사진을 더듬으려는데 어머님이 다소 여윈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잡아주는 착각이 들었다. 내가 헛꿈을 꾸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부지불식간의 환상 같은 장면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내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 아버님 부고를 받았는데 어머님 사진이 빈소에 모셔진 상황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때 마침 분향실에 후배마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상주들 없이 다들 조문을 하고 나온 걸 깨달았다. 지금까지 경험했던 문상과 너무나 달라 몹시 당혹했다.


분향실에서 서둘러 나와 접객실에 들어갔다. 조문객들이 환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고개를 이리저리 둘러보니 후배가 맨 안쪽 가운데 테이블 근처에 있었다. 후배가 위치한 자리로 가는데 여기저기 왁자지껄한 웃음과 정담이 한가득이다. 요즘 빈소가 예전처럼 울음바다는 아니라지만 마치 호상을 넘는 경사가 난 듯 활달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을 정도다. 상주한테 실례인 것 같아 마음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런데 다가설수록 자세히 보이는 후배의 얼굴도 웃음꽃이 만발했다. 슬픔을 웃음으로 가리기 위함이라 하기에 상심의 그늘이 없는 입꼬리가 하늘을 향했다.


정작 놀라움의 절정이 내 앞에 펼쳐졌다.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는데 춘당 어르신이 멀쩡하게 가운데 테이블의 정중앙에서 조문온 빈객들과 웃음 한가득한 담소를 나누고 계신 것이다. 황당한 내 얼굴을 보셨는지 내 손을 이끌어 맞은편 빈자리에 앉히시고는 오늘의 사정을 알려 주셨다.


후배의 춘당께서는 돌아가실 날을 받아 놓으셨다는 것이다. 수술이나 백약이 무효인 상황에서 의사가 예상한 운명의 그날을 하루하루 기다리신단다. 이미 자녀들에게는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고 건강보험공단에 연명치료 거부의사마저 등록해 놓으셨다. 이제 주위의 부축을 받아야 하지만 어느 정도 거동을 할 수 있고 극심한 통증에서 자유로울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생의 마지막을 당신께서 하나씩 마무리해 나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미리 부고를 보내 어릴 적 친구들과 그간 알아왔던 여러 지인들, 일가친척, 자손들의 지인까지 두루 만나 상심 대신 기쁘고 아름다운 추억을 소재로 당신의 화양연화를 떠올리며 잔치상을 푸짐하게 먹고 가란 차원에서 초대를 했다는 것이다. '이런 조문이 허락될 리 없는데 도대체 병원 장례식장에 어떻게 허락을 구했냐?'라고 여쭸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 때 장례식장이 만원을 이루기도 했지만 기대 수명이 늘어나고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장례식장 역시 장기적으로 운영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던 차였단다. 그리하여 이른바 '생 장례식' 다시 말해 춘당처럼 자신이 죽은 다음에 부음을 띠우고 빈소를 꾸려 문상객들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서 치료불가를 확인한 환자의 경우 본인이 원할 경우 생전에 먼저 장례식을 치른 다음에 고인이 돌아가시고 나면 가족들만으로 조용히 장례를 마무리하는 사업을 후배 아버님의 요청으로 시험 삼아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쩌면 빈객들에게 실례일지 모를 생존 장례식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나름 충분히 이해가 되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우선 장례식이 돌아가신 분을 기리지만 사실 살아남은 이들이 고인의 주검 앞에서 후손들을 위로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재미있는 소사에 헛헛한 웃음을 띠지만 모두의 가슴 한편에는 먹먹한 슬픔과 허탈함, 박탈감이 웅크리고 있을 일이다. 그런데 생존 장례식에서는 우선 아버님이 불러 모으신 친구, 지인들과 유쾌한 사담을 연이어 이어간다. 마치 돌아가시고 나서는 웃을 수 없으니 미리 충분하게 웃고 즐겨보자는 모습 같다. 후배도 마찬가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춘당께서 돌아가시겠지만 이렇게 먼 곳에서 흔쾌히 찾아와 준 당신의 친구, 동료, 지인들에게 둘러싸여 되돌이킬 수 없을지언정 아련한 그 시절을 안주거리 삼아 마지막 연회를 거하게 하니 마음이 가볍지 않을 리가 없다. 나 역시 이런 후배를 보며 아버님 얘기도 하고 우리가 회사 다닌 시절에 겪었던 희로애락을 소재로 연이어 술잔을 기울여 나갔다. 이제야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이해가 간다. 고인이 될 주인공과 상주, 문상객 모두가 fun 한 이별 잔치였던 것이다.


너무나 기쁘고 행복한 마음에서 문득 눈을 떴다. '생존 장례식'은 오늘 새벽에 꾼 잠시 잠깐의 춘몽이었다. 그런데 꿈에서 깼어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생존 장례식이 언젠가는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장례 문화가 될 수도 있다고 믿어지기까지 한다.


프랑스 역사가 필리프 아리에스 그의 저서 '죽음의 역사'에서 죽음을 네 가지로 분류했다. 우선 길들여진 죽음이다. 중세 초반까지 인간은 죽음에 친밀했다. 늙을수록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운명과 자연의 순리에 친밀하고 익숙해지려 했다.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인 것이다. 해가 뜨는 동쪽 하늘 방향으로 머리를 눕히고 가족과 친지, 마을이웃에 둘러싸여 죽기 전에 작별을 하는 죽음이다. 중세 후기에는 자신의 죽음을 중시했다. 길들여지고 친숙한 죽음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다룬 그림을 보면 모두에게 둘러싸여 행해지는 죽음이란 작별의식에서 망자는 하늘의 천사를 우러러본다. 나는 죽음을 집행유예 받은 死者이고 그 유예기간이 짧고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시작되니 사후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18세기에는 타인의 죽음이 보편화된다. 이제 죽음은 더 이상 내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어야 한다. 타인에게만 일어나는 일로 간주한다. 죽음이 공포화되어 이를 딛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된다. 타인의 죽음을 낭만적이고 화사하게 치장한다. 마지막으로 금지된 죽음이다. 산업화 이후 20세기 후반의 추세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집에서 내 식구, 이웃사촌, 친지들에게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죽음 자체가 금기어가 되었다. 병원에서, 요양원에서 혼자 죽는다. 장례식장이 필요해졌고 병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과다한 의료행위를 하거나 불필요한 연명치료라는 의료장사에 몰두한다. 죽음이 시장화된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심심치 않게 장의사 점포를 볼 수 있었다. 상당수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고 집에서 상을 치렀다. 선친도 병원에 계시다가 퇴원하여 집에서 임종을 맞으셨고 장의사가 3일 장을 준비해 줬다. 이제는 병원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장을 치르는 장례문화가 보편화되었다. 이전의 죽음에 대한 역사는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만큼 죽음은 부정적 이미지로 격하되었고 내가 맞이해서는 안 음습한 대상이 되어버렸다.


생존 장례식은 우리에게 만연된 금지된 죽음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였다. 고인을 추모하고 경건하게 상주들과 그의 생애를 돌아보고 상심을 나누는 오늘날의 장례 문화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과연 고인을 추모의 대상이라는 제삼자 적 존재로 여기는 것이 영원불변할 순리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떠한 죽음이던 인간의 존엄성이 높여져야 한다. 특히 Chat GPT나 로봇처럼 인간을 대체하는 수단들이 인류를 위협하듯 등장하는 21세기에서 자칫하면 인간은 신적 존재로 떠오른 인공지능과 로봇에 밀려날 처량한 신세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물격화된 신들 아래로 스스로의 자존감을 한껏 낮춘 채 말이다. 비단 죽음만이 아니다. 인간 그 자체가 존엄하고 휴머니즘의 목적이 되어야 만이 인류가 새로운 생명체이자 물적화된 신에게서 도구화되지 않고 해방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쩌면 내가 행복할 죽음은 길들여진 자신의 죽음일지 모른다.


죽음을 연구한 필리프 아리에스는 행복하게 죽기 위해서는 사는 법을 알아야 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죽는 법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오늘 새벽에서 우연찮게 체험한 생존 장례식에서 나는 잘 살고 잘 죽는 법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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