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바다미 가는 길
그리고 택시를 타고 후블리 시에서 바다미 시로 가던 동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또 다른 세상이었다. 사탕수수와 목화밭, 반듯하게, 잘 경작된, 광활한 평야, 소가 이끄는 큰 쇠바퀴나무수레, 그 위에 올라탄 남녀노소 이웃주민들, 길가의 변변찮고 하찮은 구멍가게들, 짙은 갈색 피부에 흰 무명옷차림의 남성들까지. 이는 내가 사는 사회, 도시, 심지어 고향나라에서마저도 아주 오래전에 사라져, 지금은 먼 과거가 되어버린, 추억의 모습들이다. 나는 그것들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데 객쩍게도 내 젊음이 고개를 든다.
이 또한 도로 위 온갖 이동수단의 화려하고 원색적인 장식은 마치 서커스단의 행렬이나 공연장을 방불케 했고, 층층이 쌓아 올린 사탕수수의 위험천만한 곡예, 오색띠와 꽃들, 식물잎으로 치장한 색다른 차량들 모습은 카르나다카 주이기에 가질 수 있는 고유풍습이자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중 화려한 장식의 대형 트럭들은 어느 대지주의 소유물임을 짐작케 했고, 더 멀리 영국식민지 시절의 한 측면을 엿보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것은 힌두신을 섬기는 그들이 무사일생을 기원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물론 개인적인 추측이나 이 호화로운 장식 너머로 사람들은 그다지 즐거운 모습이라기보다는 사막의 메마른 땅을 떠올리게 했고, 딱딱하고 경직된 폐쇄적인 분위기로 다가왔다. 풍성한 토지를 품고 사는 풍요나 여유로움과는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고, 밝고 순박함보다 혹독한 노동의 지친 대가처럼 보였다.
타밀나두주 사람들 미소와는 다른 모습에, 번영된 고아주의 양상과도 달랐다. 이 묘한 인상은 나의 선입견일까? 카르나다카 지방의 특색일까?
숙소에 도착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어느새 서쪽하늘로 기울어져 시큰둥하다. 따갑게 내리쬐던 햇살도 고개 숙인 늦은 오후. 그런데도 택시 문을 열자 '훅' 하며 달라드는 열대성 더위가 내 목덜미를 질 건 누른다. 덩달아 하얗게 말라버린 흙먼지가 수증기처럼 훨훨 내 가랑이를 감싼다.
호텔은 입구의 널따란 공터에 세월을 느끼게 하는 아름드리 울창한 큰 나무들 곁에서 그나마 품격을 드높여 우리를 맞이한다. 역사를 증언하듯 낡은 건물은 시내와 멀지 않음에도 조용해서 좋다. 그러나 다소간 불친절한 직원들을 보면서 인도정부로부터 운영되는 관료주의 건성인지, 카스트제도의 단면을 보는 것인지, 그냥 동네 인심이 그러한 건지 알 수는 없으나 시골 깡촌 깊숙이 들어와서 이것저것 따지며 가릴 입장은 아니었다. (사실은 순박한 시골인심을 바랐다)
콜라비치의 방갈로에 비하면 그야말로 호텔급의 호텔이지 않은가. 방과 욕실은 넓어서 운동장 같았고, 하얀 시트가 깔린 두 개의 큰 싱글 침대는 튼튼하며, 양쪽 벽에서 선풍기 두대가 돌아가면서 에어컨까지 겸비되었다. 무엇보다 심한 소음이 아니라서 좋았다. 비단 낡고 오래된 가구들은 투박스레 찍혀서 모서리마다 속살이 드러났지만 원목의 고풍스러운 멋에 쉬이 눈감을 수 있었다. 욕실은 몇 차례의 보수공사를 거쳤는지 일관성 없게 듬성듬성 깔린 타일은 색색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넓고 쌩쌩하게 돌아가는 환풍기가 달려있으니 손빨래한 옷가지 말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편리했다. 이렇게 허술한 것들 가운데서도 작정하고 장점만을 골라서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때는 명성이 꽤 높았던 호텔임을 알 수 있었다.
인도는 각 주마다, 도시마다 또는 기후와 토양에 따라 삶과 인간성, 풍습과 경치가 분명하고, 곳에 따라 인종과 언어, 종교도 다르다. 따라서 각각 미묘하게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 특유한 문화를 가진다.
국토면적이 작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미국, 캐나다만큼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동한 시간은 거리에 비해 매우 길고 험난했다. 특히나 교통이 원활하지 않는 이런 시골 소도시의 경우 그 상태는 더욱 심하다. 만약 인도의 구석진 시골여행을 원하신다면 충분히 긴 시간을 예정하고 떠나시라 훈수를 두고 싶다.
여행객은 극소수 외국인을 제외하면 순례길에 나선 인도인이 대부분이라 우리 같은 외국인이 생활하는 데에 불편함이 없지도 않다. 하지만 그 덕분에 현지인들 문화를 제대로 보고 느낄 수도 있다. 여행의 참맛이 톡톡하다는 뜻이다.
참맛의 여행이란 아름다운 곳에서 느슨하게 장시간 머물며 현지인처럼 호흡하는 것이다. 눈, 코, 입, 마음과 정신은 물론 피부의 세포까지 열어 놓고 음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짧은 기간 수많은 유적지를 경주마처럼 널뛰기식 찍기를 한다면 무엇을 제대로 보겠는가. 자신의 몸속에 스며들 여유가 없다. 인간이 사물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감각은 시간에 정비례한다고 본다. 한 곳에 머무는 시간만큼 그 지각의 깊이가 다르고, 기억과 정신, 영혼 속에 젖어드는 격과 차이도 크다. 겉핥기식 바라보기보다 깊이 있게 새기며 음미하는 여행이야말로 진정한 참맛의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지인이 내게 물었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메모를 하냐?"라고 "어떻게 그것들을 다 기억해서 글로 생생하게 표현하느냐?"라고.
나는 말했다. "사진을 보면 당시 깊게 새겼던 인상들이 떠올려진다고" 그렇다. 하지만 그 인상은 한 곳에 머물렸던 시간들에 비례해서 얻어졌음을 밝힌다. 만약 그 순간 긴박하게 움직였다면, 내 감각적 인지작용을 위한 여유도 공간도 약소했거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인상도 없는 것이다.
나는 카뮈의 <여름>과 <결혼>을 읽으면서 더욱 이 점을 깨달았다. 그의 유년시절을 보낸 알제와 오랑에 관한 글에서는 유독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가 살아서 움직이듯 생생하다. 그것은 그의 글 쓰는 천재적 능력도 있겠지만 그가 그곳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아름답게 그리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요컨대, 그것은, 분명, 그의 몸이 기억해서 만들어낸 글이라고 느꼈다.
그리고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바라볼 때 우리의 감각은 활발한 인지작용으로 인해 자연스레 생겨난다. 요컨대 깊은 인상으로 새겨진다는 뜻이다. 기억에도 당연히 오래 남는 법이다. 다시 말해 무엇이든 예사롭게 보지 않고, 여유를 가지고 관심 있게 사유하고 관조하는 마음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가령 모두가 알시다시피 비행기나 TGV(또는 KTX)를 타면 빠르고 편리함은 보장된다. 그러나 그만큼 한정된 것만 보일 것이다. 만약 그만큼의 거리를 걷거나 버스, 자동차를 탄다고 가정해 볼 때 우리는 예기치 못한 수많은 것들을 목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속도와 시간에 따라 보고, 보이는, 경험하는 것들의 차이가 크기 마련이다.
이것은 내가 하는 여행 방식이다. 지역마다 공간에 따라 색깔과 공기가 다르고 인심이 다름을 관조한다.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한다. 오래 머물기를 원한다. 새로움과 다름의 발견을 좋아한다. 솔솔 한 재미를 추구한다. 이 즐거운 순간을 오랫동안 인상으로 남긴다. 이 감정이 내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정신과 영혼을 맑고 자유롭게 한다. 윤택한 삶으로 이끌어 치유한다.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남편은 짐을 내려놓자마자 감기약과 파스를 사려고 오던 길에 눈여겨봐 둔 약국으로 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단다. 내 어깨도 열차 안의 차가운 냉방 탓에 화가 단단히 났나 보다. 육신이 나사 빠진 기계처럼 여기저기서 아우성을 친다. 나는 씻지도 않은 채 침대 위에다 다리를 쭉 펴고 드러누웠다. 비로소 숨을 길게 들이쉬어본다. 아! 이 편안함.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쾌적한 공간에서 낮잠을 이룬다는 생각, 긴 여정으로 고단해진 몸이 에어컨 하나만으로도 오래간만에 호강하는 기분이 든다. 현대문명의 위력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현대인이고, 현대인이었다. 시큼하게 음습한 겨드랑이 땀냄새, 축축했던 기세가 에어컨 바람에 한풀 누그러진다.
약국에서 돌아온 남편은 처방전이 없이도 항생제를 살 수 있었다고 아주 흡족해한다. 아직은 의료체계가 현대적으로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언감생심 현대화가 언제나 좋은 것만은 아닌 듯하다. 분명 우리 같은 사정이나 형편에서 비현대적인 체계가 편리함도 있는 법이다.(물론 악용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