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같이 2018년 9월의 베를린으로 떠나보실래요?
[에필로그]
나는 ‘재즈 피아니스트’라는 호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재즈 피아니스트이다.
현재 나는 음악을 하고 있지만 전공인 재즈 피아노 연주는 거의 하지 않는다.
쇤베르크가 그랬듯이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그 모두가 대중성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사랑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축복이 있다면 좋겠지만 ‘사랑’과 ‘존경’은 각각 하나의 단어이다.
‘재즈’라는 음악은 매니아적인 음악이다. 매우 훌륭한 음악이고 나는 여전히 재즈를 사랑하지만, 특히 우리나라에서 재즈라는 음악은 대중들에게 여전히 생소한 음악이다.
나는 사랑받는 음악을 하고 싶었고 아니 사랑받는 음악‘도’하고 싶었고 결국 현재도 크게 사랑받는 음악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랑받는 뮤지션 이를테면 대중가수들과 주로 작업을 한다.
프로듀싱이나 편곡 또는 작곡을 통해 그들과 일한다. 하지만 사실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기보다 “다중 적”으로 일하고 싶었던 것이 내 본질적인 욕구이기에 재즈 연주가 아니더라도 실험적인 다양한 창작활동에 여전히 매우 열정적으로 매진하고 있다.
클래식 피아노를 시작으로 해외에서의 마지막 학업과정을 버클리에서 모두 마치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거의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다.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지만 그 끝은 허무했고 “내 것이 남은 게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허무한 생각들이 커져가는 동안에도 시간이 실력이 되어 지속적으로 더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 가다 보니 감사하게도 가르치는 일들과 다른 사람들의 요구들을 채워주는 커리어와 수입이 상승하며 나날이 소위 말해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만 같을 때, 나는 “이건 아니다”라는 뚱딴지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브레이크 없이 완벽하게 돌아가는 타이트한 내 삶이 곧 조그마한 균열에도 터져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모두가 나를 필요로 했고, 마치 내가 굉장히 완벽하게 주어진 모든 일들을 컨트롤해내는 것만 같았고, 그런 상황이 참 위험하다고도 생각했다.
이러한 고민은 또 다른 딜레마로 이어졌다. 내가 “배가 부른 걸까?” 아니면 “그저 용기 없는 넋두리에 불과한가?” 내 고민의 저의가 의심스러웠다. 항상 가슴 뛰는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늘 상 자신감 있었고 활력도 있었고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 매우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하면서 스스로에게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에 때로는 힘들고 지치는 일도 당연하게 또는 감사하게 받아들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당시의 지치고 불만에 가득 차있는 내 모습을 보며 나이를 먹어가는 게 사실이지만 또 다른 의미의 영혼이 늙어가는 기분 혹은 빛을 잃어가는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분명히 정말 사랑하는 일들을 하고 있는데 왜 지치는 걸까?”, “한때는 이런 비슷한 상황을 꿈꿨던 것 같은데, 뭐가 만족스럽지 않은 걸까?” 그렇게 5년을 넘게 버틴 것 같다.
그 일들은 지금에 와 다시 생각해봐도 분명히 행복했고, 보람 있었고 가치 있는 일들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그러나 바쁜 게 표창이 될 수 있는 건 기한이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그것만으로 스스로를 설득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소진되고 있었다.
나는 습관적으로 아무도 나를 시험하지 않을 때 이런 방식으로 나를 시험한다.
그렇게 나는 “그래 네가 진짜 자유를 느끼고 싶다는 그 마음이 어디 진심인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안정적으로 굴러가던 일들과 24시 언제나 대기해야 하는 프리랜서 고용자로서의 공포와도 같은 공백, 그리고 어찌 됐건 노동의 결과로 따라오는 돈을 다 뒤로하고 일단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이 정도는 감수해야만 계속되는 이 이중적 딜레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끔 “예술을 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평범하지?” 스스로를 의심하다가도 이럴 때 보면 “아, 내가 평범하지 않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이방인이 되기로 선택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구속하는 나에게서 도망쳤다.
문제는 없었다.
변화하기 위한 때가 찾아왔던 것일 뿐.
그 시작의 배경이 되어준 베를린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