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by 김세은


내가 처음 예술이라는 분야를 전문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 시작은 ‘피아노’라는 악기를 통해서였다.

피아노라는 악기를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여러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경험했다.

소리가 나는 사물이 특별한 이유 없이 신기했고, 궁금했고, 그렇게 가까워지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 본래 ‘사랑’에 대한 정의를 굳이 어렵고 난해하게 정의했던 내가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에야 와서 보면 이러한 감정 또한 ‘사랑’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렇게 피아노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의 꿈이 시작되었다.

음악, 그리고 예술이라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 아빠를 졸라 피아노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전문적으로 레슨을 받고 미국까지 가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대게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가치를 명확하게 알고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피아노를 전공한다고 했을 때 중. 고등학교 때 사람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너는 좋겠다.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해서”와 “너는 좋겠다 길이 정해져 있어서”였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 역시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 또한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바다 한가운데를 표류하면서 “이미 어느 정도 길이 나 있는 이 루트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길이 나오겠지” 하는 아주 무책임한 생각들로 꽤나 긴 시간을 지나왔을 뿐이다.

결국 빨리 정한 사람이 아니라 빨리 그 고민을 시작한 사람이 더 빨리 그 길에 도달하겠지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는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 욕망이나 꿈이 있다는 것과, 살면서 누구나 불안해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평생을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추구하면서 산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구경하는 건 쉬운 일이기에 아주 쉽게 구경하고 단정 짓는다.

적어도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의 20대의 원동력은 그런 것이었던 것 같다.

남을 부러워하거나 비교하면서 살아야 하는 세계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나는 것.

그래서 부표를 정해놓지도 않고 일단 힘이 닿는 데로 달음박질하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동원해 배우고, 깨닫고, 훈련하고,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충만했던 나의 20,30대는 후반으로 갈수록 지쳐갔다.

그제 서야 나는 깨달았다.

달아나고 저항하는 것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른 기준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힘이 없다는 것을.

불안은 계속되고 행복을 위해 선택한 나의 꿈은 그 목적이 퇴색되어 갔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고 소리를 낼 때의 기쁨과 희열, 악기와 나의 교감이나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정서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실체도 없는 어떠한 기준으로 달려 나간 결과는 온 힘과 열정을 바친 시간에 비하면 허무했다.

끝까지 내달린 길목에 왔는데 정작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없는 기분.

‘아, 이게 다야?’, ‘이거였어?’, ‘이러려고 그렇게까지 기를 쓰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받으면서 달아난 거야?’, ‘이게 끝이 아니면 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결국엔 죽어야 끝나는 건가?’, ‘죽으면 이 허기짐에서 벗어나는 건가?’와 같은 너저분한 상념들과 자조들이 문득문득 기분 나쁜 악취처럼 올라왔다.


분명히 시작은 설레고, 기쁨으로 충만했고, 행복을 꿈꾸며 꾼 꿈이었는데 마지막이 죽어야 벗어날 수 있는 허기짐이라면 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인가?

말도 안 된다.

열심히 내달린 그 힘으로 이제는 제대로 된 방향을 설정해야겠다.

인간에게 주어진 꿈이라는 것은 허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분명한 실재일 것인데 그것이 어떠한 방식으로 발현이 돼야 진정한 가치를 찾을 것인가 끝없이 고민했다.



피아노에 대한 오해, 하나


피아노는 감수성에 의해 연주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훈련을 통해 연주된다.

피아노는 듣는 사람들에게는 감정과 감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연주자에게는 철저한 훈련에 의한 기본기가 없이는 단 한 음도 제대로 누를 수 없는 악기이다.

88개의 음을 한 음씩 또 동시에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힘의 세기로 완벽하게 조절해 나가면서 감정을 만들어 나간다.

훈련이 안 돼있으면 감정을 표현할 여유는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

한 음 한음을 아주 고르게 내기 위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본능적으로 쳐질 때까지 연습한다. 몸에 완전히 흡수시키는 것이다.

그 뒤 어느 정도 일정하고 고르게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제야 음들을 낮은 단계에서부터 컨트롤하는 연습을 시작한다.

수영을 배울 때 느낀 점이기도 한데, 나는 내 몸을 말 그대로 '내 몸'이니까, 내가 소유했으니까 철저히 나에 의해 지배당하고 컨트롤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듯하다.

정작 숨 쉬는 것조차 여건이 안되면 쉴 수 없는 존재일 뿐인데

온몸을 다 사용해야 소리를 낼 수 있는 피아노는 손가락 10개, 관절 하나하나, 손 끝의 모든 감각과 근육을 다 써야 하는 악기이기 때문에 결국엔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겠지만 매우 까다롭고 섬세한 훈련이 필요하다.

그래서 과장을 좀 더하자면 전 국민이 한 번씩은 거쳐가는 악기지만 피아니스트로 남는 사람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신나서 다가왔다가 제대로 할라치면 멀찌감치 도망가는 게 대부분이다.

즐기면 될 줄 알았는데 즐기기는커녕 온통 자기와의 싸움이다. 게다가 너무 정직하게도 끈질기게 참고 연습한 만큼 훈련의 결과가 나온다.

참 가슴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한 음 한음이 하나의 호흡으로 연결되며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들을 듣다 보면 한 번쯤 꼭 도전해보고 싶은 악기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피아노는 남의 도움 없이 제 앞 길을 완벽하게 커버할 수 있는 대장 같은 악기이기도 하니, 흔하게 볼 수 있다고 만만하게 볼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게 밴드의 리더는 피아니스트들이 많다.

그리고 아주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작곡과 편곡을 따로 수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일들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솔로 악기 중에 가장 각광받는 악기임에 틀림없다. 피아노는 오케스트라 편곡도 가능한 악기이니 능력치가 대단히 훌륭한 악기다. 물론 모든 악기가 다 그러하겠지만



피아노에 대한 오해, 둘


피아노는 타악기다.

대부분 멜로디나 화성이 부각되기 때문에 멜로디나 화성 악기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피아노는 때려서 내는 타악기로 분류된다.

중요한 것은 건반을 때리는 것이 아니라 건반과 연결되어 있는 뒤편 해머를 '울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