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님, 잠시 말씀 좀......"
명색은 내가 1과장이지만 그 날 이후 진료시간을 많이 줄이고 환자도 줄인 상태라 과의 대부분의 업무를 알아서 잘해나가고 있는 A과장에겐 업무적으로나 그 외에도 상하의 관계 따윈 바라지도 않거니와 명색만 과장인 나와 그의 접점은 거의 없다.
저렇게 시작하는 멘트는 지금까지 겪어본 바에 의하면 대부분은 관둘 때 아니면 타과와의 트러블로 중재를 요할 때 정도인데...?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의자에 주섬주섬 앉자마자 충혈된 눈으로 울듯한 표정이 되어 버린다.
30대 후반이 다 되도록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무남독녀인 A과장의 어머님께서 직장암 진단을 받으셨다고 했다. 연세가 좀 있으시지만 그간 대장경검사를 한 번도 받아보신 적이 없으셨는데, 최근 혈변으로 들렀던 의원에서 대학병원으로 전원되어 진단받으셨단다. 병원에 사직서 제출하고 어머님 병간호라도 하려나 했더니 민간보험 들어 놓으신 게 없어서 계속 돈 벌어야 해서 것도 안 된단다. 원래 여러 지병이 있으신 데다 고집마저 대단하셔서 수술하고 장루를 설치한다는 말에 수술은 절대 못하시겠다 하셔서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병행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단다. 지병으로 서울의 모 대학병원을 다니셨던 분이라 모든 치료는 서울에서 하시겠단다.
A과장은 아직 다 안 쓴 연중휴가를 앞으로 수시로 쓸 것 같으니 양해를 부탁한다고 온 것이었다.
(나와는 달리) DNA에 play 유전자가 없는 A과장에게 나는 수시로 제발 휴가 쓰고 놀러 좀 가라고, 그렇게 일하다간 언젠간 폭발한다고 했지만 "나중에요" 하던 그는 이제 원 없이 휴가를 쓰게 되었다. 세상 일이란 참...
오늘도 얼른 마무리하고 서울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등 떠밀어 봤지만 꿈쩍 않는다.
최근의 치료율을 들어서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며 위로를 하고 각자의 대기환자를 보고 나니 지겹도록 되새김질한 그 기억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그리고 옆방으로 갔다. 나에게 자문을 구한 암환자들에게 항상 해왔던 조언을 하기 위해.
스케일링과 예방접종이 그것이다.
항암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풀이나 영양제 혹은 보조치료제에 대한 조언을 기대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실망들을 하지만 가정의학과 의사로 그리고 암 진단을 받았던 경험자로서 '특별히 항암치료를 앞둔 환자에게는' 반드시 항암치료 전에 스케일링과 예방주사를 맞으시라고 한다. 그렇다. 그 스케일링이다. 치과에서 정기적으로 받는 그 시술. 항암치료를 하게 되면 가장 자주 생기는 감염 증상이 구내염이다. 치석이란 쉽게 말해 세균 덩어리이므로 면역저하 상태에선 쉽게 세균 증식을 일으킬 수 있고 구내염이 생기게 되면 그냥도 식욕저하와 오심 같은 증상으로 잘 못 먹는 환자가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0대 이상의 환자에게는 면역이 떨어지면 걸리기 쉬운 감염증에 대한 예방접종을 권한다. 폐렴과 대상포진이 대표적이며 요즘 같은 겨울엔 아직 독감 예방접종을 안 했다면 추가하도록 권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면 첫 번째 항암치료 전에 하기를 권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잘 드시도록 권한다.
식이요법과 같은 거창한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가리지 말고 골고루 잘 드시되 항암치료로 백혈구 수치가 떨어질 때는 생식은 금하도록 한다. 그 어떤 영양제보다 양질의 단백질을 섭취하는 게 우선이라고 몇 번씩 이야기하는데 아직도 육류는 몸에 나쁘고 채식이 무조건 좋다는 믿음을 갖는 사람이 꽤 많다는 게 안 믿어지겠지만 현실이다.
A과장에게도 같은 조언을 하니 독감 예방접종도 아직 않으신, 어머니가 아니라면 다루기 힘든 환자 타입이라며 쓴웃음을 짓는다. 그래도 며칠간 병원행으로 어느 정도 타협을 하신 것 같다며 주사약을 챙기고 치과진료를 예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