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eon Aug 29. 2020

너 중성화수술 할래?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의 모순에 대하여

벼리는 중성화를 조금 늦게 했다. 얼떨결에 키우게 된 강아지라 관련 지식이 부족해서, 여기저기 오줌을 싸고 마운팅을 해대는 것이 심해지고 나서야 수술의 필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성화는 어릴 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개나 고양이를 키워보지 않았다면, 당연히 중성화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이 중성화지, 동의 없이(물어본다고 어떤 개가 동의를 하겠냐마는) 반려동물을 '거세'시키는 일은 전혀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정말 이상적인 환경이 아니라면, 중성화를 시키는 것이 결국 동물에게도 이로운 일이다. 해소할 수 없는 발정으로 동물과 사람 모두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동물에게는 전혀 선택권이 없다. 그리고 누군가가 얼마나 자신의 반려동물을 사랑하는지와 관계없이, 동물에게 선택권을 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동물이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그러니 사람과 동물은 같을 수가 없다.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생선은 머리가 맛있다고 하셨던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어른이 되어서 이해할 수 있지만, 치킨이나 초콜릿을 혼자만 얄밉게 먹어치우는 우리를 강아지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혼내는 부모는 그것이 결국 아이를 위한 사랑이며, 언젠가 아이가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엉뚱한 곳에 오줌을 싼 강아지를 혼내는 주인의 행동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아무리 착각한대도, 결국 반응에 따른 보상으로 행동을 유도하는 조건화(conditioning) 그 이상일 수 없다. 강아지가 이를 이해할 수 없대도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랑'은 결국 일방적인 자기만족인 것이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물에 대한 사랑은, 같다고 착각할 수 있어도 본질적으로 그 성질이 다르다.


벼리는 자신이 거세되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아마 그 사실 자체를 이미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기억은 남아있지만, 고통은 오래전에 사라졌기에 지금은 편안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여전히 거세된 욕망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죄를 짓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동물을 키우지 않는 것이다. 중성화를 하는 이유는 동물과 인간의 공존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니, 여기에 인간의 이익이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익'이 그저 동물의 귀여움을 곁에 두고 누리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동물을 위한다는 많은 선택들이 결국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고, 동물에게는 선택권도, 그 선택을 이해할 능력도 없다. 이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동물을 위하는 것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역시 결국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다른 인간 가치들과 타협가능한 것이며, 그 가치의 관철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


나는 벼리 이후로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의 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