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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찌 Nov 12. 2023

트라우마 극복, 뇌 과학의 관점에서

회복탄력성은 원상 복구가 아니라 해동과 재냉동이다.

최근 서울에서 몇 차례 일어난 흉기난동 사건은 서울 시민 모두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뉴스로만 접하던 내게는 사실 남의 나라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꼬박 2년을 넘게 전 세계가 난리를 치던 코로나도 나는 한 번 걸리지 않고 넘어갔으니 나는 만성 안전 불감증에 빠진 상태였다.


그러던 중 출근길에 흉기난동 '오인' 사고가 발생했다. 현장은 오인이라 하기엔 재난상황과 같았고, 아무런 정보도 없이 생존의 위협에 사로잡혔던 시간은 트라우마를 일으켰다.


겁에 질려 이틀간 출퇴근을 포기한 나는 트라우마 책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고, 트라우마가 비단 생존의 위협뿐만 아니라 생존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되는 모든 "가상의" 위험에 대해 모두 발현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출처 : 책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요>


트라우마를 연구한 브루스 D. 페리에 따르면 뇌는 4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이미지의 맨 아래, 뇌간에 오감을 통해 입력되는 외부 감각과 내부 수용 감각이 입력되면 최초의 신호는 뇌간 - 간뇌 - 변연계를 거쳐 마침내 피질에서 추론을 한다. 이 순서는 절대적이라서 감각이 들어오자마자 피질로 점프하는 경우는 없다.(실제로는 뇌의 작동 속도가 빨라 거의 동시에 인지부터 판단이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말이다.)


인간이 위협과 공포를 느낄 때 신경물질은 피질까지 뻗어나가질 못하고 감각에 압도당해 버린다. 그럼 그다음 순서는 오판 혹은 회피*다. 사건 당시 나는 지하철 밖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라 플랫폼 끝까지 달려버리는 오판을 했는데, 실제 범죄자가 있었다면 생사가 오갔을 선택이었을 거란 생각에 진땀이 난다. 위기 상황에 내 뇌는 믿을 만 한가? 그게 아니란 사실을 처음 깨달은 순간이었다.

*회피 : 해리가 더 정확한 개념이지만 회피, 현실 부정이 더 쉬울 것 같아서 풀어썼다.


이젠 많이 알려진 개념이지만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실제 위협이 아닐 때도 투쟁-도피 반응을 일으킨다. 그런 상황에선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한다. 정형화되지 않은 행동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또한 오판을 할 확률을 높이기 때문에 위험하다.


문제는 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위기 상황을 대비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특수부대도 아니고 평범한 직장인이 일상생활에서 생존의 위협을 느낄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 예외적인 상황 때문에 트라우마에 젖어서는, 진짜 일상을 영위하지 못할 위기에 처할 것이라 생각했다. <회복탄력성>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트라우마에 대해 공부하며 알게 된 사실은 회복 탄력성이 "원상복구"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회복 탄력성은 이 사건을 잊고, 없었던 듯이 잘 지내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근육통처럼 찢어져버린 일상 감각을 새로운 세포들이 메꿔 새로운, 조금 더 강한 형태로 개선하는 것에 가깝다. 어떤 책에서는 이를 해동 - 재냉동이라고 표현했다.


나는 일상의 모든 순간에 칼을 든 범죄자가 튀어나올 것을 상상하는 버릇이 생겨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을 타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산다. 불안감에 휩싸이는 순간(뇌간의 작용) 지금 실존하지 않는 위협을 인식하며(피질의 작용) 뇌가 오작동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한 번의 악몽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참 신기한 게, 생존의 위협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죽음의 공포는 단 한 번의 경험뿐일지라도 일상의 풍경을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그러니 얼마나 강력한 감정인가.

동시에 우리는 이와 같은 "가상의" 생존 위협 - 따돌림, 불합격, 인정받지 못함 등 - 때문에 얼마나 삶을 힘들게 살고 있는지도 돌아보게 된다. 트라우마의 발생 기제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발동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나는 지금 막연한 불안감(뇌간)에 휘둘리고 있진 않은가?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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