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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을 거치면 광고도 예술이 되었다

알폰소 무하 원화전

by the cobalt

'아름다운 시대' (La Belle Epoche)에 태동한 아름다운 미술,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의 거장 알폰스 무하가 한국에 왔다.


평일 오전 마이아트 뮤지엄에 방문했다. 수백 명의 인파들이 미술관 로비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들어가지 않는 걸까, 궁금했지만 수백 명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전에 빨리 전시를 보고 제대로 사진을 찍어야 한다.


관람 중 익숙한 얼굴이 사람들을 몰고 들어온다. 미술계에서 유명한 '스타 도슨트'였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스타 도슨트의 인기를 실감했다. 이제는 더 이상 전공자만 미술로 인도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장을 찾고, 미술을 갈망하면서 그에 걸맞은 댄디하고 쉽고 재미있는 미술 해설사를 원했고, 그에 따른 요구에 부응하는 도슨트는 미술계에서 스타덤에 오른다.


시대적 요구에 정확하게 부응한 알폰스 무하의 작품들을 보면, 어쩌면 그 도슨트와 무하가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루의 시간 - 아침의 눈뜸, 낮의 빛남, 저녁의 관조, 밤의 휴식, 1899.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예술을 원한다.


'새로운 미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는 식물에서 영감 받은 아름답고 유려한 곡선, 파스텔 톤의 과하지 않은 아름다운 색감, 세련된 여성상의 등장, 장식적인 디자인을 특징으로 하는 스타일을 일컫는다. 약 1890년에서 1910년 사이에 기간 프랑스 파리라는 당대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도시에서 태동된 양식이다.


1871년에서 1914년 프랑스 파리는 경제, 문화, 산업 전반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뤘고 풍요롭고 낙관적이며 여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이어졌다. 정치적으로는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이 시기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사람들은 짧은 시기를 '아름다운 시기', '벨 에포크'(Belle Epoche)라고 부른다.


곧 당도할 세계대전의 참혹함과 비인간적인 폭력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채, 짧은 시간 찬란히 빛났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시기',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예술을 원했다.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은 진부했고, 산업화로 인한 대량생산 제품과 기계문명은 당대 사람들의 미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그 시대적 요구를 알폰스 무하의 '아르누보', 즉 '새로운 미술'이 완벽히 충족시켜 주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해져 있었다"

이 말에 알폰스 무하만큼 들어맞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체코 출신 무명 삽화가였다. 크리스마스에 다른 화가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떠날 때조차 무하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진 지 오래. 무하는 갈 곳이 없었다. 마치 명절에 갈 곳이 없어 대학 기숙사에 홀로 남아 있는 학생의 처지와 같았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무하의 스타덤의 기회는 이때 찾아왔다.


그는 친구 화가를 대신하여 다른 화가들이 떠난 르메르시에(Lemercier) 인쇄소를 지키고 있었다. 달력이나 포스터를 주로 인쇄하는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 당대 최고의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는 <지스몽다>의 포스터가 마음에 안 든다며, 변경을 요구했다. 당황한 매니저는 혼자 인쇄소를 지키고 있던 무하에게 이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무하는 허겁지겁 <지스몽다>를 보러 갔고 빠르게 사라 베르나르를 스케치하고 포스터를 완성시켰다.



"당신은 나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었다"


사라 베르나르가 <지스몽다>의 포스터를 보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예언은 사실이 되었다. 1895년 1월 1일, 파리 전역에 이 포스터가 휘날렸다. 사람들은 열광했고 심지어 포스터를 뜯어가기도 했다. 사라 베르나르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알폰스 무하의 작품 속에서 여전히 그 존재와 화려했던 자태를 과시하고 있다.


<지스몽다>, 1896.



포스터는 모든 면에서 파격적이었다. 당대 파리에서 그려진 툴루즈 로트렉의 포스터와 비교해 보자.

툴루즈 로트렉, <제인 아브릴>, 1893.


로트렉의 포스터는 대담한 색, 거친 선, 그리고 춤추는 여성의 얼굴이 특징적이다. 여성을 이상화하려는 시도조차 드러나 있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다. 로트렉의 포스터의 여배우가 로트렉에게, "날 그렇게 끔찍하게 못생긴 여자로 만들지 말아 달라"며 애원했을 정도였다.


반면 무하의 포스터는 어떠한가. 사라 베르나르가 무하를 혹여라도 빼앗길까 서둘러 계약을 체결하고, 순회공연에도 대동하고, 연극 무대장치와 소품 디자인까지 맡길 정도로 무하는 사라 베르나르를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그의 나의 34세였다.



예술을 일상 속으로


이후로 무하에게는 각종 제품 광고 포스터 의뢰가 쇄도했다. 이번 전시에서 무하가 쏟아지는 의뢰를 얼마나 성심성의껏 응답했는지를 알 수 있다. 비스킷, 술, 향수, 자전거 등 각종 광고에서 무하의 디자인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디자인과 색채, 선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많은 광고의뢰에도 광고주들과 중산층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면서, 무하의 그림은 아르누보 미술의 전형으로 자리 잡는다.


<트리피스텔>, 1897. Legouey & Delbergue 사의 술 광고



아르누보 미술은 미술을 단순히 미술관에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 속에서도 누릴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한 예술이었다. 건축, 가구, 포스터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물이나 공간에서도 예술을 적용하려 했던 것이다.

무하가 디자인한 비스킷 라벨.


이에 알폰스 무하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알폰스 무하의 디자인이 들어간 제품을 사면서, 소비자는 예술작품을 구매한 것과 같은 비슷한 기분이 들게 된다. 명품 브랜드와 유수 화가들 간의 콜라보로 만들어진 제품이 현대는 익숙하지만 당대는 없던 개념이었다. 무하가 표지를 디자인한 과자를 사면서, 많은 소비자들은 무하의 틴 케이스를 버리지 않고 보관하고, 다른 물건을 담는 데 사용하며 무하의 그림을 손 안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브랜드와의 콜라보에서 정점에 다다른 작품은 주얼리 가게 푸케(Fouquet)와의 협업이었다. 1899년 푸케는 만국박람회에 선보일 주얼리 컬렉션을 무하에게 의뢰했고 이때 무하가 디자인한 보석들은 무하가 표방하고자 했던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이 주얼리 작품들은 현재 파리의 프티 팔레(Petit Palais)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예술과 제품 간의 경계는 무하에 의해 점점 희미해져 갔다.


<네 개의 보석> 루비, 에메랄드, 자수정, 토파즈. 1900. '부티크 부케' 매장 디자인 할 때 제작된 작품.


"돈 많이 벌었겠네"

전시에 함께 간 친구의 말이었다. 얼마나 다양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는지, 이번 전시를 훑어보기만 해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늦게 피운 꽃인 만큼 불태우고 싶었던 걸까. 무하의 작업량과 그럼에도 흐트러없는 작품들에 감탄이 흘러나온다.

<실바니스 에센스> 향수 광고, 1899.


6년간 사라 베르나르와의 독점계약, 상업미술, 대량복제된 달력과 판화 판권에 이르기까지 무하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고 성공한 예술가가 되었다.


하지만 말년에 그의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은 무일푼에 가까웠다. 그의 아틀리에는 늘 도움이 필요한 화가들로 북적였고, 무하는 동료와 후배 예술가들에게 관대했다. 그의 서랍 금고는 남들에게 선뜻 빌려줄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상업미술에서 벗어나 예술가로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에 헌신하면서 무보수로 작업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예술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를 위해 타오르다


하루아침에 이뤄낸 무하의 스타덤과 이어진 상업미술, 그리고 오랜 시간 이어진 타국생활은 그를 지치게 했는지 모른다. 그는 체코 독립(1918) 후 체코로 돌아가 신생 체코 슬로비아 정부를 돕는 일에 매진했다.

전시에도 볼 수 있듯이 그는 체코 최초의 지폐, 정부 주도 복권, 우표 등을 무상으로 디자인했다. 나아가 프라하 미술관 건립 계획에도 자비로 참여하는 등, 그의 나라를 위한 노력들은 헌신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같은 노력은 <슬라브 서사시> 연작에서 정점을 찍는다.


<슬라브 서사시> 연작




<러시아의 복구>, 1922.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족적 정서를 30년간 파리에서 잘 나갔던 화가가 되살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예술계의 반발은 컸다. <슬라브 서사시>는 모든 점에서 최첨단이었던 '파리 스타일'과는는 달라야 했다. 물건을 팔기 위해 눈을 즐겁게 하는 여인들의 이미지에서 가장 핍박받고 서글프지만 강한 여성들을 표현해야만 했

다.


이를 위해 무하는 1913년 슬라브 민족의 역사와 민속예술,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답사 여행을 떠난다. 이때 제작된 그림들을 찾아보면 화려하고 세련된 파리 스타일은 온 데 간데없고 예술적, 종교적으로 깊은 성찰을 이어나간 흔적이 보인다.


전시의 4부, <슬라브의 화가> 섹션의 여성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파리지앵' 여성들과는 확실히 다른 골격과 이목구비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리 시대' 여성들의 얼굴을 잔뜩 분칠 한 비현실적인 우리 시대 광고 속에 등장하는 연예인 같다면, 슬라브의 여성들은 넓은 얼굴과 다부진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다. 여성스럽다기보다는 중성적이고 현실적이다. 무하가 슬라브의 민족과 문화를 현실적으로 담아내려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슬라브 서사시> 창작에 들어간다. 고대부터 20세기까지에 이르는 대형 기획이었고, 체코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독립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대가 없이 이뤄진 20년간의 도전이었다. 아쉽게도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는 이번 전시에 오지 않았지만, 사진으로만 봐도 무하가 몇 백 년 동안 이어진 외국의 폭정과 슬라브 인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그려 내는 것에 헌신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슬라브 서사시>의 창작과정은 무하에게는 어쩌면 물질적 부유함에 비할 수 없는 예술적 한계의 도전이자, 한 사람으로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무하는 이 연작을 프라하에 기부했다.



<1918-1928 프라하>, 1928. 체코 슬로바키아 건국 10주년 기념 포스터.


1939년, 나치는 체코를 점령하고 무하는 민족주의 미술가로 체포되었다. 수차례에 걸친 심문의 과정에서 노령의 무하에게는 가혹한 것이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무하는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나치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1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려들었다.


"나는 외국에서 돈을 벌고 싶었고, 민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아무런 대가 없이 선사하고 싶었다. 이런 내 생각에 사람들이 코웃음 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내 뜻은 원래 그렇고 이것으로 그만이다."


김은혜, <성공한 예술가의 초상, 알폰스 무하>, p. 251.



"내 뜻은 원래 그렇고 이것으로 그만이다"라는 무하의 말이 깊이 있게 울린다. 민족의 개념이 옅어진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각 시대와 국가는 그 시대에 걸맞은 미술을 필요로 한다. 미술과 문화가 없으면 나라는 그 정체성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 시대적 요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불사른 알폰스 무하의 행보와 그의 예술적 유산이 더욱 깊이 있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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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apollo-magazine.com/alphonse-mucha-prague-lithography-sarah-bernhardt-savarin-palace/

https://www.ft.com/content/6b943009-b8e7-45e1-b966-240d8eb95e9a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333993

https://www.mucha-epopej.cz/the-slav-e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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