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투라 서울 <Anthony McCall: Works 1972-2020>
당신은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빛과 수증기로 만들어진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멕콜이 만든 조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단순히 시각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일반적인 조각의 영역을, 맥콜은 확장시킨다. 실제로 2024년 아트넷과의 인터뷰에서 맥콜은 자신의 작품이 영화와 조각, 퍼포먼스, 드로잉이라는 "네 가지 예술적 실천이 겹치는 지점에 존재"한다고 밝힌 바 있다. 맥콜의 작업은 영화, 설치, 드로잉, 퍼포먼스를 결합하여 독창적인 예술적 경험으로 관객을 초대하며, '확장된 시네마'라는 영역을 구축했다고 평가받는다.
감각이 살아나는 예술적인 체험은 많은 현대미술 작가들이 관객에게 선사하고 싶은 경험일 것이다. 하지만 작가들의 의도는 난해한 작품 앞에서 어쩔 줄 모르는 관객들에게서 좌절되기도 하고, 관객들은 작품과 오히려 단절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푸투라 서울에서 만난 앤소니 맥콜의 작품은 "내 작품들은 관객의 물리적 존재를 요구한다"는 그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 흔치 않은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하얀 수트를 입은 전시장 지킴이가 동선을 안내한다. 전시 초입에 걸린 앤소니 맥콜의 초기작 <불의 풍경>(1972)에 등장하는 남성들 같았다.
6분짜리 영상인 <불의 풍경>을 보자.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녘, 흰 옷을 입은 남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땅에 불을 붙인다. 마치 땅 위에 불로 드로잉을 하듯, 그들은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점차 어둠이 깔려오고 불은 어둠이라는 새로운 시공간에서, 하나의 의식(ritual)으로 마무리된다. 불꽃의 점화와 소멸의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자연적 요소에 인간이 개입하여 상호작용하는 경험, 이는 맥콜의 예술 세계에 큰 축을 이룬다.
전시를 다 보니 전시장 초입에 마주했던 <불의 풍경>은 마치 앤소니 맥콜의 전시에 초대하는 초대장과 같은 영상이었다. 불, 인간과의 상호 작용, 시간과 공간의 가변성이 주는 아름다움과 숭고함. 이후로 이어진 작가의 고민과 예술의 시발점을 선언하는 것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이거 밟고 가요?"
이어 <써큘레이션 피겨스>(1972/2011)로 안내된다. 이 역시 앤소니 맥콜의 초기작으로, 서로 마주 보는 거대한 거울 한 쌍, 그리고 바닥에 흩뿌려진 찢어진 신문지로 구성된 설치 작품이다. <써큘레이션 피겨스>를 지날 때, 어김없이 관람객들은 '흰색 수트의 남자'에게 묻는다. "이거 밟고 가요?"
전시장에 있으면 변기도(마르셀 뒤샹), 바나나도(마우리치오 카텔란), 바닥에 흩뿌려진 사탕도(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 모두 작품이다. 곤잘레스 토레스의 작품처럼, 전시장에 흩뿌려진 사탕을 가져오긴 해 봤지만, 앤소니 맥콜의 <서큘레이션 피겨스>처럼 작품을 밟아 본 경험은 없었다.
그런 관람객의 당황스러움을 포착해서인지, 전시는 '굳이' 신문지를 밟고 거울을 지나야 다음 작품으로 이동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었다. 맥콜의 작품은 관람객이 작품을 '보는 것' 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관람객은 작품 안으로 직접적으로 초대된다.
일정 기간마다 새로운 신문지로 교체되는 작업인 만큼, 관람객의 발자국은 그의 작품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불의 풍경>에서 불을 붙이는 사람들처럼, 관객은 그의 작품에 변화를 만들고 작품은 그제서야 완성된다.
'관객 참여형' 설치미술이 1990년대에 들어 활발해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1970년에 처음 설치된 <설큘레이션 피겨스>가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다.
'찍고 찍히는' 시대
구겨진 신문지를 밟는 낯선 감각을 통과해 들어가면 1972년 퍼포먼스 영상을 마주하게 된다. 맥콜은 런던에서 15명의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들을 초대했다.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 아마 1970년대 사진기를 항상 들고 다니는 유일한 집단이었을 것이다.
신문지와 잡지가 구겨져 흩뿌려진 바닥, 양면에 설치된 거울이 있는 공간으로 초대된 사진작가와 영화제작자들은 서로 찍고 찍히기를 요구받는다. 그들은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이 아닌, 동료들을,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마도 런던에서 예술을 하는 서로 아는 작가들로 구성되어 있을 터. 참여한 사람 모두 이 퍼포먼스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사진을 찍는 모습을 또 찍고, 찍힌다. 관람객에 입장에서도 거울 사이를 걸어 다니며 자신의 모습을 찍으면서 이 퍼포먼스에 참여한다. 이제는 사진작가들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사진을 찍고, 찍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이미지의 생성. 거울에 비치는 이미지의 반영과 무한하게 반복되는 과정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다. 우리가 매번 찍는 이미지들은 어떻게 될까. 전시장에 밟히는 신문지처럼, 언젠가는 그렇게 폐기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지를 생성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이미지는 어느새 우리의 삶이 되었기 때문이다.
앤소니 맥콜은 끊임없이 이미지가 생산되는 현재를 1970년대에 예견한 것일까. "그는 시대를 만들고 우리는 이제야 도착했다"는 전시 설명이 납득이 간다.
기술보다 앞서간 아이디어
어두운 방에 프로젝터를 쏘아서 완성시킨 안소니 맥콜의 '빛 조각' 작품은 1973년에 <원뿔을 묘사하는 선>(Line Describing a Cone)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탄생했다. 1973년 다락방 안에서 프로젝터가 벽에 빛의 점을 쏘는 이 작품은 그 방이 먼지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맥콜이 의도했던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스웨덴의 쿤스트 할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는 공기가 너무 깨끗한 나머지 공기 속 '빛줄기'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깨끗한 공기가 '빛의 조각'을 창조하지는 못했던 것. 2024년 아트넷과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때 작품의 매체는 빛이 아니라 안개와 먼지, 연기, 연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의 아이디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기술적 발전이 필요했다. 맥콜은 설치 작품 제작을 멈췄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해이즈 머신(연무기)을 알게 되었다. 연무기는 인공 안개 생성 장치로, 공기 중에 아주 미세한 입자를 분사해 빛의 경로를 시각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연무기와 디지털 프로젝션 기술이 그의 오랜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 그는 2000년대 기술에 발전에 힘입어 디지털 프로젝션 기술을 활용해 컴퓨터로 생산한 "선 드로잉"을 벽에 투사하고, 설치 공간에는 연무기(해이즈 머신)를 사용해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었다. 아이디어가 기술의 발전으로 구현되는 데 수십년이 걸린 셈이다.
그렇게 20년이 넘는 공백기를 뛰어 넘어 완성된 작품이,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당신과 나 사이>(2006), 그리고 <스카이 라이트>(2020)이다. 관객들은 일상생활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어두운 공간으로 들어간다.
마치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과 같지만, 영화처럼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관람객이 몰입적 환경에 최적화된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관람자들은 작품을 '관람'하기보다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의 구성요소가 된다.
관객이 작품이 되는 순간
깊고 어두운 공간 속에서 저 멀리 높이, 달이 떠 있는 듯하다. 분사되는 안개는 밤공기와 바람 같이 느껴진다. 프로젝션은 고요히, 땅을 비춘다. 빛이 비치는 자리의 안과 밖은 공간을 나누지만 폐쇄적이지 않다. 빛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는 현대 도시의 삶에서 잊고, 빛과 어둠, 그림자를 온 존재로 인식한다.
<스카이라이트>에는 자연을 모티프로 한 천둥과 번개음으로 이루어진 사운드가 추가 되어 있다. 다양하고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자연에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숲속을 걷다 매섭지 않은 천둥 번개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당신과 나 사이> 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몸소 느끼게 된다. 두 개의 디지털 프로젝션으로 구성된 이 작품 안에서 관람객들은 서로를 의식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작품을 바라보고, 느낀다. 작품을 경험하는 개개인의 모습이 아름답기 때문이기도 하고 서로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작품 속 서사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 아주 오랜 기간 머물렀다. 작품이 신기해서 바라보고 손을 뻗어 보는 사람, 서로를 사진 찍는 사람, 그리고 공간이 주는 숭고함과 몰입적 환경에 취해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 그리고 그저 그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들은 앤서니 맥콜의 예술적 공간에서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며, 작품 안에서 개개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고요하고, 사색적이며, 타인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는 신비로운 체험이었다.
http://m.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21985&Newsnumb=20250521985
https://www.artforum.com/features/1000-words-anthony-mccall-168857/
https://plastermagazine.com/interviews/anthony-mccall-the-father-of-immersive-art/
https://www.apollo-magazine.com/light-fire-and-smoke-an-interview-with-anthony-mccall/https://www.apollo-magazine.com/anthony-mccall-solid-light-tate-modern-review/
https://news.artnet.com/art-world/anthony-mccall-studio-visit-2526026
https://www.theguardian.com/artanddesign/2013/jan/28/hayward-gallery-light-show-exhibi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