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길 위에 있었다
밀영 가는 길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그날도 역시나 무작정 떠난 스케치 여행이었다. 여기저기 목적 없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그곳이 정확히 어딘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다니다 보면 어느새 시골 어딘가였고 인적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풀밭이기도 하고 산길이기도 하고 강가이기도 했다. 나무를 그렸고 길을 그렸고 어린 들풀을 그렸다. 가끔은 새벽의 기운을 그리거나 바람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었는데 무형의 그것들은 주로 눈을 감고 마음으로 그렸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후드득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져 신발을 벗어던지고 흙길을 걸었다. 발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움과 흙의 부드러운 촉감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새 빗방울은 굵어졌고 바닥에 가느다란 여러 개의 물길이 생겼다. 물고랑도 생겼다. <길 위에 서다> 작품은 흙 위를 걷고 있는 내 두 발이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는 빗속에서 서서히 식어갔고 주변은 무채색으로 물들었다. 흑과 백이 흔들리는 시간이었다. 회색의 그림자는 나의 발아래까지 비집고 들어왔고 그 옆에 작은 돌 두 개를 얹어 놓았다.
길 위에 서다_종이에 볼펜_77x64_2009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의 태양과 달이다. 한 아이는 태양이라 불렀고 한 아이는 달이라 불렀다. 태양은 밝고 긍정적인 성격에 항상 나를 웃게 해주는 아이다. 어릴적 부터 인사성이 밝아서 어른들에게 칭찬을 자주 들었다. 이 아이는 너무도 환해서 태양과 같은 밝은 존재였다. 달은 캄캄한 밤에 나를 비춰주는 유일한 빛이다. 차분하고 속이 깊어서 내가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세워주는 정신이 강한 아이였다. 이 둘은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집을 나오면서 하나님에게 맡긴 나의 생명과도 같은 아이들이다.
내가 가는 길에 항상 옆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나를 매번 일으켜 세우는 유일한 사랑. 그렇다. 세상에 내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이 아이들을 위해서였을 것이다. 지금은 나와의 두 번째 탯줄을 자르고 어엿한 청년이 되었다. 손이 많이 가던 어린 시절은 분명 나의 일부였고 생명 그 자체였다. 현재 다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레 독립을 하고 스스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나가고 있다. 이제 아이들에 대한 사랑은 신에게 내맡김으로 이어가고 있다. 집착도 소유도 아닌 독립된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믿음으로 말이다.
당시 <길 위에 서다> 그림을 그릴 때를 회상해 본다. 돌은 지구의 조각이고 생명의 일부이다. 먼지조차 지구의 한 부분이듯 이 세계는 생명체의 응집이다. 자연과 인간과 사물은 하나이며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던 그때는 그림에 돌이 자주 등장했다. 하나의 생명체로써 돌이었다. 그 이후에는 돌이 눈물로 묘사되기도 했다.
예술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시켰다. 불안과 갈등, 결핍을 껴안은 채 늘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때론 너무 지칠 때 주저앉고 싶은 생각이 순간 음습해오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