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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작가 May 11. 2023

길을 가다

한 그루 나무가 되어

예전에 <상록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꽤 어렸을 때니까 중학교 시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내용은 깊이 이해하지 못했지만 책 속에는 농촌을 배경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주인공으로 나왔다. 그때 책을 읽으며 나에게 그 선생님의 상이 뿌리 깊게 박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사철 내내 푸르른 상록수가 나의 의식을 지배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같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 깊숙이 결심이라도 한 듯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지금도 나무가 참 좋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주린 배를 수돗물로 채우고 산을 오르면서 인식이 자리 잡히기 시작했다. 배고픔이 나에게 첫 인식의 근원이었다. 그 이후부터 나의 의식이 무엇을 원하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시냇물 흐르는 소리, 떼 지어 노는 물고기들, 버들강아지, 노란 개나리꽃, 나비, 과수원, 그 겨울 꽁꽁 언 논밭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연 안에 있는 무수히 많은 생명들은 내 존재의 가치를 알게 해 줬다. 나의 꿈은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만히 떠올린 화가의 꿈도 있었다.




너무나 가난했던 그 시절에는 부모님이 물감을 사주지 않았다. 학교 숙제로 그림을 그려야 할 때는 어김없이 옆집에 사는 경란이라는 친구에게 뛰어갔다. 친구의 그림을 먼저 그려준 다음 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는데 그래도 마냥 좋았다. 학교에서 미술상은 전부 내가 다 받았으니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궁화 그리기 상이 었다. 초등학교 때 그리기나 글짓기 상을 자주 받았지만 중학교 가서도 그리기 대회에서 상은 죄다 내 몫이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영어 선생님이 유독 나를 이뻐하셨는데 어느 날 조용히 나를 부르시더니 도화지를 한 묶음을 주면서 영어 책에 있는 대화하는 장면을 그려오라 하셨다. 수업 시간에 활용한다고 했다. 기쁜 마음에 도화지를 들고 집에 갔다. 영어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면서 도화지를 찢으셨다. 그림 그리면 밥 빌어먹는다며 도화지들을 모두 밖에다 내동댕이 쳤다. 물감 한번 못 가져보고 집에서 그림도 마음껏 못 그리면서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건 운동장에 앉아 나무 막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종이나 물감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게 없어도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된다고 나를 위로했었다. 그땐 운동장이 캔버스가 되어줬다. 수업시간에도 책에 친구들의 뒷모습을 자주 그리곤 했는데 공책이며 책에 빼곡히 선생님과 친구들의 모습을 그리고 낙서를 해댔다.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이 그림 그려달라고 종이를 내밀었고 난 머쓱 거리며 만화 캐릭터를 그려주곤 했다. 비록 가난하고 가진 건 없어도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이 그림 잘 그린다고 칭찬해 주고 인정해 줘서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은 열악한 환경보다는 내 의지로 일어서게 된 지금의 배경이 되었다. 내 안에 있는 길을 따라 걷게 된 나만의 이유 같은.



                                     내 안의 길_패널에 아크릴, 볼펜_50x40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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