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익명 Aug 31. 2024

그남자, 회피형

"누구에게도 미움받기 싫어서 미움받는 행동을 사서 하는 자" 

무언가 불만이 있지만 싸우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태도를 지닌 자를 흔히들 회피형이라고 한다. 그의 성격이 원래 덤덤하고 수동적이면서 우유부단 하다고 생각했기에 그가 보내는 비언어적 신호들을 의식적으로 무시해보았다. 어떤 사람이든 있는 그대로 좋아해주고 서로 사랑해줄 수 있지 않은가? 내 나름대로 존중의 표시를 해봤다. 찐따같은 점도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한달 뒤에 한국을 떠난다는 연락이 그를 놓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처럼, 아니면 연애처럼 애절하고 절절한 감정따윈 찾아볼 없었다. 그의 찐-스러운 점들이 하나 생각나고, 그걸 텍스트화 해서 온라인 상에 그의 찐-스러움을 박제해두자는 생각 정도는 들었다. 미안하지만 헤어진 김에 위자료 값으로 연애 썰을 조각조각 분석해서 조회수 벌이에 쓸 생각이다. 그렇다. 나는 돈의 망자다.


1. 넘어오기 전까지만 잘한다. 

사귀는 초반에는 꽤 잘 지냈다. 그는 찐따같았지만 그래서 재미있었다. 첫만남에 대뜸 "별똥별이 무수히 떨어지는 옥수수밭이 고향이니 같이 갈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며 웃는 얼굴에 순진함을 느꼈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사귄 여자친구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였다는 말에 관심이 갔다. 일하느라 바빠서 그랬다는 말에 공감을 하기도 했고 말이다. 꼬실 때는 같이 미국에 가자느니, 고향집에 가자느니 하며 난리법석을 부리더니, 적당히 넘어왔다 싶은 시점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일이 바빠서, 친구들과 정기적인 취미생활 약속이 있어서, 자기계발을 하기 위해 등등 그런 자기만의 스케줄 때문에 점점 소홀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처음 사귈 때부터 명시하긴 했다. 일이 첫째요, 내 생계가 먼저이니 한밤중에 보고 싶다는 이유로 달려갈 수는 없다고. 책임감 있는 어른인 관계로 너와 밤 늦게까지 놀 수 없고, 시간이 되면 집에 갈 것이며 같은 이유로 장거리 여행은 갈 생각이 없다는 말까지. 그런데 아뿔싸. 나보다 더 한 새끼였다. 


2. 기념일,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새끼, 기념일을 전혀 안 챙겼다. 엎드려 절 받기라고 하던가. 첫 1주년 기념일. 친구들과 놀 약속을 하다가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아니?" 란 말에 찔려서 황급히 뛰쳐나온 그를 그날 그 자리에서 찼어야 했다. 비 맞아가며 기다리는 모습이 처량해보여서 한 번 봐준다고 했던 게 실수였다. 데이트 비용을 온전히 그 혼자 다 낸건 그 날이 마지막이였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조금 화가 난다. 

 

3. 대화를 시도하면 회피한다. 

정말 끔찍한 포인트가 바로 이것이다. 얼굴보고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 말에 지금은 바쁘다, 언제까지 바쁘다 그런 식으로 서서히 연락을 줄이는 태도. 그 태도가 괘씸했다. 극단적 T인 나는 "당신의 이러이러한 태도에 나는 이런 감정을 느꼈다. 당신의 의견을 묻는다." 는 식으로 대화를 시도했고, 그는 대놓고 '안읽씹'을 선택했다.  


4. 감정을 읽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 

그는 미국인치고는 남의 감정이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본 백인-미국인-남성들은 일종의 'I LOVE MY SELF" 의식이 강한 편이었다. 그는 한국식 표현으로 말하자면 '눈치'가 좋았다. 흥미로운 특성이라고 생각했다. 헤어질락 말락한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그는 감정에 예민한 데에 비해, 이런 행동을 하면 상대가 싫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사회성 눈치'가 부족했다. 줄여 말하자면 "뚝딱거렸다" 


5. 항상 말 뿐이다. 

어디에 놀러가자, 무엇을 해보자. 이런 이야기를 가끔 하긴 하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와 같이 구체적인 실현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슬쩍 떠보면서 물어보면 어물어물 회피하기까지. 


6. 사과는 하는데 변하는건 없다.

연락하기 바쁠 정도로 힘들다면 하루 중 아무 때나 식사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3일 보냈다. 


7. 외롭지만 가까이 오는 것은 싫다.

옆에 있길 원하지만 사생활은 꽁꽁 숨기려 했다. 살살 긁어가며 물어봐야 대답하는 정도? 처음엔 부모님이 이혼했다 정도로만 알려줬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친아버지는 전과자에 이복동생은 이미 이 가족을 손절한 상태. 양아버지와 친어머니도 최근 갈라섰다고 한다.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고 했던가. 외조부도 엄마의 이혼 소식을 모른다고 하고, 양아버지가 모든 이복동생들의 친권을 다 가져갔다고 한다.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 시점에서 이런 중대한 가정사를 숨긴 부분부터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해가 가지 않다가도, 이해하려고 했다. 가족사가 상처일 수도 있을 테니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가족사가 회피적인 성향에 많은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모든 이별에 나쁜 사람이 하나씩 있다고 했던가. 이번 이별은 내가 먼저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we're done. 마지막 인사로 네가 준 물건들이나 도로 받으러 오라고 했다. 집앞에 두면 가져가겠단다. 코로나 시대의 비대면 배달음식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 얼굴 보고 헤어지는게 예의이니 와서 가져가라고 했다. 곰인형, 반지, 그리고 주사위. 헛웃음이 나왔다. 고등학생 연애도 이것보다 부산물이 많이 나올텐데 싶어서. 


주식이 -8% 를 찍은 탓일까. 이별보다 날아간 주가에 마음이 더 쓰인다. 그의 찐-회피스러움이 이 손실을 채워준다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인생은 계획에 없던 일의 연속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