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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Nov 07. 2020

9.  언제나 빚을 갚는다.

7층 라푼젤의 작은 결심




호화스러운 VIP 병실 생활은 제법 길었다. 꼭대기 층에 갇힌 라푼젤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매일 간호사님께 "혹시 오늘은 일반 병실 자리 소식 없는지요?"를 되묻기 일수ㅋㅋ 호텔 룸서비스 마냥 혈장교환술도 VIP 병실에서 따로 받는 등 극빈 대접을 해주시지만 (엄연히 내돈내산ㅋ) 도통 맘 편히 발 뻗고 지내기 어려운 불편한 곳이다. 이왕지사 편히 있을라고 해도 대대손손 유서 깊은 소시민이다. 몸은 가난을 기억한다더니ㅋ


VIP 병실비가 암산이 되지 않을 즈음 일반 병실의 빈 침대가 나왔다. 아산 병원 동관 혈액암 병동 7층의 1인실로 이동하게 되었다. 6인실로 가는 여정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1인실도 가격은 만만치 않은데 VIP 병실과 꽤나 차이가... ㅋㅋ


우스개 소리로 '1인실 = 독방 (유배지)'이라고들 한다. 여긴 선택 불가의 영역이라 VIP 병실에서 내려와 일반 2 or 6인실로 가는 중간 단계 거나 격리 치료 대상자 전용이다.





혈액암이라 하면 흔히 '백혈병'을 떠올리는데, 혈액암 종류는 백혈병 포함 100여 가지가 넘는다 한다. 병동에는 여성들이 훨씬 많았으며, 다른 암병동에 비해 연령층이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대부분 면역력이 매우 낮아 위생과 방역에 철두철미한 곳인데, 코로나 19로 인해 방역 단계가 최상으로 조정되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에 한해서 보호자 1인만 출입 가능하며, 환자들은 7층 밖을 나올 수 없다. 침실 커튼은 항상 닫고 있어야 하며 커튼 안 침대에서도 무조건 마스크 착용이다. 잘 때도.


혈액암병동 7~8층을 통틀어서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아 머리카락이 남아있는 환자는 내가 유일하다 했다. 그래선지 간호사님들도  내 머리카락을 보고 병실 맞게 찾아왔냐고 종종 물어보셨다. 독보적인 긴 생머리로 1인실 독방에 있자니 심심함을 넘어 외로웠다. 무엇보다 혈액병에 대해 귀동냥을 하고 싶었다. "저와 같은 케이스를 아시는 분??" 하면서 환우님들의 찐 정보를 듣길 원했다. 허나 여기 6인실은 실로 Full 만원이었다. 기다려보는 수밖에 ㅠ


면역력이 낮은 환자들이라 커튼을 열지 못한다 (in 6인실)





병명이 아직 나오지 않은 채로 매일 '혈장교환술'을 받았는데, 한꺼번에 14명 분의 혈장이 수혈되니 부작용은 여전히 빈번했다. 온몸이 뜨거워지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드러기가 나고, 체온이 급작스레 떨어져 오한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살고자 버티며, 반쯤 감은 눈으로 항상 머릿속에 떠 올린 건 '혈장의 출처'다.


나의 병은 치료제가 현재까지 마땅히 없고, 그나마 유일한 치료법은 '내 혈장을 타인의 혈장으로 몽땅 바꿔치기' 란다. 고도의 현대 의학 안에서 묘하게도 원시적인 느낌의 치료다. 불특정 다수의 이타심으로 모인 피만이 나를 살리고 몸안에 자리 잡아 병을 이기게 해 준다니.. 신통하다.


고마운 이들이 헌혈해 준 혈장이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구석구석 자극을 준다. '너는 이제껏 바득 거리며 살면서 남에게 베풀며 살았니? 아픈 이들에게 먼저 손 내민 적 있었니?' 하면서 세포 하나하나에 말을 걸어온다. 매번 할 말이 없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게다가 생면 부지한 나를 위해 헌혈증을 기꺼이 내어주는 은인들도 있었다. 남편이 모아 온 헌혈증을 받아 드니 감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고, 한 장 한 장이 너무나 무거웠다. 앞으로 건강히 살아남아 갚아야 할 어마 무시한 빚의 무게니까.


여태껏 살면서 후천적 인격 양성을 위해 크게 노력하지도, 먼저 남에게 베풀고 나누며 살아오진 않았다. 창피하지만 명백한 팩트다. 그나마 딱 하나 지킨 신념이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빚지지 않는다.' 정도 랄까.


드라마 <왕좌의 게임>을 보면서 "라니스터는 언제나 빚을 갚는다 (A Lannister always pays his debts)"라는 명대사를 들을 때마다 '크으.. 취향 저격!!' 이랬던 나다.


남편이 모아다 준 헌혈증 일부. 앞으로 잘 살아야겠다.



이로써 남은 인생 컨셉이 확실히 잡혔다. 거창할 것 없이 원래 신념 그대로 이어가되 적극적인 '은혜 갚은 까치'와 '흥부네 제비'로 살기로. 빚지고는 못살아!! 먹튀란 없다. 나는야 한국의 라니스터다. 모조리 갚아버릴 테닷! 까악 까악.





혈장 교환술은 목에 삽입된 관으로 진행되고, 추후 이 관을 제거하면 흉이 진다 했다. 나중에 살만해져도 흉터 보면서 자주 되새겨야지. ‘혼자 사는 세상 아니다. 먼저 다가서서 베풀고 보듬 보듬 하며 멋지게 살자’라고. 


이 와중에 “흉터가 생길 목이 가여우니 작고 반짝이는 것을 걸어달라”라고 남편에게 미리 퇴원 선물을 지정하기도. 아오ㅋㅋㅋ 언제 으른됩니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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