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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Nov 27. 2020

11.  느슨한 위로

From. 아빠


입원 병동 6인실에 입성하기 전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드디어 이동.

아산 병원의 룰은 한번 입원실 침대가 정해지면 퇴원 날까지 자리이동 불가. 얼결에 창가 쪽 좋은 자리에서 선정되었고, 자연스레 터줏대감이 되어 가는 중이다.


냉장고도 6명이 공평하게 쓸 수 있게 되어있음.  대부분 소화 잘되는 류만 드심.  



그 사이 TTP라는 희귀병을 판정받았다.

혈전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증
(Thrombotic thrombocytopenic purpura, TTP, Moschcowitz syndrome)
 : 체내 소혈관에서 광범위한 미세 응고를 일으키는 혈액응고계의 희귀 질환이다.
용혈성 빈혈, 혈소판 감소, 정신신경 증상이 3대 증후인 원인불명의 질병.
<출처 : 위키백과>


의사 선생님의 설명을 간단히 풀이해 보면, 급성으로 자가 면역 체계가 꼬임. 원인을 알 수 없고, 완치 없는 희귀병. 혈소판 응집을 관여하는  Adamts13이라는 효소가 급 저하되어 혈전 (피떡)이 생김. 특히 뇌혈관에 생길 시 큰 문제가 됨. 아오!! 어려워잉 ㅠ


유일한 치료법이 혈장교환술. 언제까지 받아야 할지는 미지수.

정말 정말 다행인 것은 담당 교수님이 몇 년 전 나와 완벽하게 동일한 케이스의 환자를 치료해보셨다는 점. 전례가 있으니 참고할 수 있고, 양쪽 치료를 통해 데이터 베이스가 잡히게 된다.

플랜 B로는 아직 국내에 시판되지 않은 최신 약물을 들여와 정부 쪽 승인을 받아 투약할 예정이다.

대형 병원만의 강점들이 있긴 있다 ㅎㅎ






병명과 치료 플랜 등을 가족과 지인에게 알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얘기를 듣자마자 바로 "... 그래서 낫는데? 완치 가능?"이라고 허겁지겁 되물어 왔다. 담당 교수님이 내게 그랬듯 애매한 표정으로 "완치의 개념이 없는 질환이래"라고 답해줘야 했다. 탄식과 한숨이 살짝 오고 간 후, 기운을 북돋는 격려를 받았다.


생물 선생님이신 아빠는 병의 정보, 증상 등을 누구보다 귀 기울여 들으셨고, 의학 용어의 이해도도 높은 편이셨다. 질병 관련 정보를 전국구로 수집하셨고 (야생화 동호회 임원이심), 수소문하여 유사한 병에 걸렸다 완치하신 분도 직접 만나보셨다. 아빠만의 데이터를 모아서 팩트체크 후, 수시로 업데이트를 해주셨다.


번외지만, 엄마가 가장 거슬려하는ㅋㅋ 아빠의 성격 중 하나가 '4차원급 무한 긍정'인데, 되려 난 좋아한다. 아빤 큰 딸의 입원 소식에 놀라긴 했으나 금세 본인의 스타일로 위로해주셨는데, '괜찮아질 거야. 다 잘될 거야~~'라는 쪽은 아니고, 인문학과 철학적인 코드를 가미한 아빠만의 유우머가 있는 토닥임이랄까? 연륜있는 긍정맨이다. 엄만 4차원이라 놀리지만, 딸로선 고차원이라 인정해 드린다 ㅎㅎ





어느 날, 퇴근길에 잠시 들러 선물을 맡기고 갔으니, 찾아가라고 연락을 받았다.

전달해 주신 이마트 국민백을 열어보니, 너무나도 "From 아빠"였다.  



병원에서 만나기엔 낯설지만, 또 반갑다..? ㅋㅋ



한 달에 10마리는 족히 씹어대는 리얼 건어물녀는 쇼핑백을 열어보기 전부터 이미 꼬릿 하게 올라오는 냄새로 알아챘고, 오래간만에 푸하하하! 하고 웃었다. 박력 넘치는 위문품이다.






전화 걸어온 아빠한테 괜히 퉁퉁 거리며 볼멘 소리나 하던 날이 있었다. 물.론. 대충 흘려들으시곤 바로 아빠의 카더라 통신 업데이트 하심. "3개월 정도 혈장교환술과 약물치료를 받고 호전된 케이스가 있다 했다. 3개월만 버텨보자! 아빤 수영 간다 뿅!" 하면서 통화 종료. 맞네.. 나의 심통난 멘트들은 아빠에겐 대체로 타격감이 없는 편이긴 했지. 


그러고 며칠 후, 두 번째 선물이 도착했다.

아름다운 가게에서 구매한 <생각이 너무 많은 여자>라는 책과 '봉숭아 물들이기 세트'였다.

직관적인 책 제목에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었고 ㅋㅋ 직접 따온 봉숭아꽃과 명반을 받아보니 또다시 미소가 삐져나왔다. 봉숭아 물이 다 빠질 때쯤이면 괜찮아질 것이라는 아빠의 메시지인 셈이다. 돌직구와 변화구를 자유자재로 하시네, 딸내미 이번에도 삼진 아웃.


 '봉숭아 물이 100일 동안 안 빠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대~'라는 어렸을 때 주워듣던 얘기가 문득 생각이 났다. 간절한 마음으로 3일을 꼬박 손톱에 봉숭아를 뭉쳐 올렸다. 모처럼 진심이었다.  

서른 중반 딸한테 봉숭아 꽃을 따서 주는 아빠도 진심이었으니까.


병원 내 위생장갑을 이용하여 세 번이나 물들임






투병 생활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앞으로 어찌 어찌 살겠다' 라는 <살자 시리즈>로 몇 번 글을 썼는데,

대충 생각하고 살자 Everything happens for reason 이유가 있겄지~ 하면서 /5편 참조

은혜갚는 까치로 살자 /9편 참조

아빠 덕분에 하나 더 추가가 되었다. '우아하고 무해한 유머 구사자'로 살자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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