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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연스레 Dec 07. 2020

12. "어머! 무슨 화장품 쓰세요? :)"

뜻하지 않은 리즈 시절


병원에서의 스케줄이다.


AM 06:00 채혈

AM 08:00 혈액 검사 내역 업데이트 확인 (아산병원 자체 어플 '내 손 안의 차트'上)

AM 09:00 담당 교수님 회진

AM 10:00 혈장 교환술


모든 일정은 오후 5시 전으로 끝나고, 저녁 9시면 소등된다. 하루가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져 있다가 갑자기 불 꺼지면서 셧다운 되는 느낌이랄까. 시곗바늘이 '새나라의 어린이 모드'로 맞춰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팔자에도 없는 어린이 라이프로 살게 되었다 (초등학생 노노, 미취학 어린이).

즐겨 마시던 각종 주류와 커피가 일절 끊겼기에 입이 마를 때마다 깡생수를 마셨고 (+우유 200ml/매일), 삼시 세끼 꼬박 같은 시간에 식판 밥을 먹는다. 응가 횟수 및 형태까지 보고하며 장 컨디션을 체크받는다. 아무리 늦어도 밤 12시 전으로는 잠을 청했고, 낮잠도 신생아급으로 충분히 잤다.


건강에 1도 도움되지 않았던 습관들이 자연스레 정리되고, 건강의 필수 3요소 '잠, 똥, 물' 이 완벽하게 충족되니 가장 먼저 변화를 보인 건 '피부'였다. 독소가 빠지니 깐 달걀처럼 반질반질 해지면서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병원 관계자분이 잠깐 마스크 벗은 얼굴을 보고, "어머! 무슨 화장품 쓰세요??"라고 물어올 지경.


후... 입원실 지박령일 때 물광피부 전성기가 찾아오다니 몹시 억울하다. 한편으론 도대체 입원 전에는 어찌 살아왔길래. 잠깐의 디톡스로 이런 드라마틱한 효과가 나오나 싶다. 쩝 ㅎㅎ


매일 확인하는 '내 손안의 차트', 파란색 숫자는 기준치 미달일 때임.





어린이 라이프로 살다 보니, 감정선도 또한 단순해졌다. 화딱지 나는 포인트들이 줄었다고나 할까? 속세와 단절되니 열 받을 일이 딱히 없다.

화낼 명분도 없다 보니 욕심/질투/긴장 등의 카테고리들이 점차 희미해져 갔다. 불필요하게 날 선 감정들을 서서히 비워냈다. 욕심부려봤자 '내일 우유나 한팩 더 달랠까?' 뭐 이런 수준? ㅎㅎ


다만, 주의해야 할 카테고리는 '우울, 좌절, 허무' 등 이런 쪽이었다.

6인실에 오게 되니 모른 척하고 싶은 각종 사운드들이 굉장히 많은데, 어쩌다 의도치 않게 듣게 되면 순식간에 영혼이 탈탈 털리곤 한다. 이럴 땐 서둘러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지체 없이 흠모하는 천재 두 분 '조성진'과 '김연아'님을 모셔온다. 그들의 공연을 플레이하는 순간, 속세의 소음과 괴로움은 사라지고 오롯이 그들의 웅장한 움직임에만 집중하게 된다.


범접불가형 천재들의 시원한 공연으로 씻김굿 한판 하면, 내적 평화는 이내 찾아오고 잡념이 사라진다. 한층 차분해진 마음으로 내일의 식단을 정독하면서 흐트러진 감정들을 정리한다. 부정적 감정이 전이되기 전에 36계 줄행랑친다는 36세 어린이의 노하우다.



장기 입원 시 필수품,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 (남편 협찬). 몹시 소중함






최근에 거울로 내얼굴을 곰곰이 살펴보니, 피부가 말갛게 변하긴 했지만 반가운 변화는 따로 있었다. 그건 어느새 변해버린 인상이다. 뭐랄까 매운맛에서 순한 맛으로 바뀐 느낌? 묘하게 차분해진 눈매와 평화로운 미간. 24시간 마스크를 쓰다 보니 미소만으로 표현이 안되어 급조된 어설픈 눈웃음. 이런저런 표정들이 더해지고, 독소가 빠지니 얼굴이 점점 순해졌다. 


피부과에 목돈 쏟아부어본 사람으로서 잘 안다. 꾸준히 레이저로 지져가며 관리하면야 피부는 금방 좋아지나, 맑은 표정과 분위기는 돈 주고 얻어지지 않는다는 걸.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물광 피부보다 더 맘에 든다.


모쪼록, 다시 평범한 어른의 일상으로 돌아가도 지금의 내 얼굴을 까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때 보다 순했고, 담백했으며 잘 웃었음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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