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키다리 아저씨
혈장교환술 : 환자의 혈액 안에 있는 질병을 유발하는 병적인 성분을 혈액 성분 채집기를 이용하여 분리하여 제거한 뒤, 제거한 혈장의 양만큼 혈액이나 알부민을 보충하게 된다.
(출처 : 아산병원 홈페이지)
나의 경우 1회당 몸안의 혈액 1.5리터 정도를 빼내어 혈장을 분리한 후, 타인의 혈장을 수혈받게 되는데 매번 14명의 혈장을 받는다 (*몸무게/키에 따라 혈액양이 달라짐). 병명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혈장교환술이 현재까지는 유일한 치료법이다.
매일 낯선 의학 용어들이 꾸역꾸역 머리에 욱여넣어진다. 환자 생활 길어질수록 반 의사 된다더니 주워듣는 건 엄청 많긴 하다. 그럼 뭐하나 뒤돌아서면 긴가민가.
응급실 한편에 간이로 설치된 혈장 교환술 기계가 서서히 가동이 되고, 담당 간호사님이 이런저런 설명과 유의사항을 반복적으로 당부를 하셨다. 특히, 어딘가 가렵고 호흡이 힘들거나 어지러우면 즉각 콜 해야 한다. 끄덕끄덕.
약기운에 졸음이 쏟아져 눈을 감을 찰나, 입원실 자리 하나가 나왔다는 희소식을 들었다. 비워진 입원실이 VIP 병실인 줄은 이땐 몰랐지.. ㅎㅎ
혈관에서 쉼 없이 피가 빠져나가자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난방 장치가 가동될 정도다. 으슬으슬 춥고 손발이 차갑게 식자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유독 이날만큼은 긴장 탓인지 그의 손도 그리 따뜻하진 않았던 것 같다.
8편 만에 등장시킨 남편은 하루도 빠짐없이 내 옆을 충실하게 지킨 보호자다. 본 캐릭터 자체가 묵묵한 키다리 아저씨다 보니 그를 부각해서 표현하지 않았다. 제대로 고백하자면, 고마운 마음을 풀어헤쳐 글자로 쓰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다. 그에게 받은 헌신적 사랑이 내 글솜씨로는 도통 담기지 않는다. 쓰다 보면 초딩 러브장 같다ㅋㅋ.
교환술은 2시간 이상 걸리니 잠시 쉬라 하는 만류에도 손 마사지를 말없이 꼼꼼히 해주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생각이 어김없이 든다. 서로가 짠하다. 부부간의 동지애가 이런 걸까..?
아련하게 마주 보며 감상에 젖어있는데 급 싸해진다. 멜로에서 의학 드라마로 전개되는 느낌이 온다. 이건 찐이다! 간호사님께 "관자놀이가 왜 뜨겁게 느껴지죠? 코끝이 조금 간지러워요"라고 웅얼웅얼거리자 "어?? 다른 이상 증세는요? 호흡은요??"라고 큰소리로 물어왔다. 간신히 입이 떼어졌다.
...
......
담당 간호사님이 밖으로 튀어나가 "응급입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외쳤다. 의료진들이 대거 투입이 되면서 분주히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고 까무룩 의식이 흐려진다. 급작스러움이 무섭다. 정신줄 단디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어 눈에 힘을 줬다.
기계에서 날카롭게 삐이익- 삐이- 거린다. 링거에 약물이 긴급히 투약되고 의료진들이 계속 내게 말을 걸어온다. 다리가 들어올려졌다. 그럼에도 심장 박동과 혈압이 뚝뚝 떨어져 기어이 정신이 놓아졌다.
...
얼마나 지났을까..?
의식이 돌아왔고 기계에서 정상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두리번거리며 남편을 찾았는데 의료진 뒤에 빼꼼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간호사님은 일시적인 쇼크와 두드러기 증상이 왔고 다행히 지금은 문제없다고 남편을 토닥여주었다. 그러자 조심스레 다가와 떨리는 손으로 불쑥 내손을 붙잡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라고 혼잣말을 한다. 손은 차갑고, 눈은 빨갛다.
눈알까지 노랗게 변해버린 나를 볼 때도 희귀 난치병 판정을 받았을 때도 별 내색 없이 나만 챙기던 그였다. 본래가 웬만한 일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 멘털과 이성적 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제발 살려달라고 소리 내고 눈물을 뚝뚝 떨궈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패닉이 왔고, 눈물만 하염없이 흘리며 기적을 빌었다.
첫 교환술 당시가 롱테이크로 머릿속에 선명히 찍혔고, <응급실 편> 플레이 버튼이 생성되었다 한다. 이 플레이 버튼이 눌러지면 응급실에 누워 생사를 오고 가는 아내와 그 손을 꼭 붙잡은 본인이 즉각 등장하고 리플레이 시작. 분명 나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장면일 것이다. 컷컷!! 2편은 없다.
결국 남편은 양가 부모님께 전화드리게 되었다. 알게 되시면 잠 못 이루며 걱정하실 분들이라 차일피일 미뤘으나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코로나 19로 면회 제한에 보호자 1명만 출입 가능한 상황이기에 병원도 못 오시니 더욱 심란하실 터.. 놀라지 않으시게 최대한 차분히 그 간의 풀 스토리를 말씀드렸다. 물론 듣자마자 모두들 아연실색하셨지만.
내게 더 경악스러웠던 건 아산병원 18층 VIP 병실에 입원하게 된 현실이다. 흠.. 슬쩍 본 VIP 병실 입원료는 당연히 비급여 항목에 하루 백만 원이 넘어가던데. 일반 병실 자리 나올 때까지 VIP 병실에 있어야 한다네?? (듣자 하니 통과 의례라던데.. 쏙닥쏙닥) '아무렴 사람 목숨 달린 일에 돈 따위가 대수냐' 지만.. 쿨럭!
인생 컨셉이 한결같은 남편은 호텔방 같은 VIP 병실에 오니 코로나 피해 호캉스 온 기분이라 했다.
'호캉스'란 가벼운 단어에 갑자기 맥이 빠져 웃음이 났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냅다 침대에 누워버렸다. 여긴 라텍스 매트릭스를 쓰나 보다 폭신폭신하니 구름 같네. 하쿠나 마타타!!
입원 첫날, 하루가 끝 간 데 없이 길다.
이제 본 게임 진짜 시작이다. 병원밥 든든히 먹고 잘 버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