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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Nov 09. 2020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03

명품을 입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항상 느끼는 이 기분


‘하아... 옷장은 미어터지는데 입을 옷이 없다.’


만년 다이어터인 나는 특히나 작년엔 작던 옷이 올해는 맞는다든가 그 반대이던가 해서 옷장에서 입을 옷이 50%도 안 되는 것 같다. 누구보다 더 입을 옷이 없다고 핑계를 대본다. 플러스 사이즈를 입는다고 해서 옷에 대한 열정이 없는 건 아니다. 이래 봐도 소녀 풍 원피스와 니트 종류를 좋아한다. 문제는 내가 입으면 그야말로 할머니 같다는 것. (나는 내추럴 스타일의 대명사인 아오이 유우나 정려원 같은 스타일이라고 우겨보지만 남편은 ‘나 홀로 집에 2’의 비둘기 할머니가 될 거라고 주의를 준다.)


인스타그램에서 눈여겨보던 옷가게가 있는데 사장님의 센스가 얼마나 좋은지 빈티지 재킷들을 본인의 스타일로 리폼해서 판매하고 소장하신다. 눈과 마음을 모두 빼앗겨 먼 거리를 무작정 찾아가 그나마 저렴한 원피스 한 벌을 샀다. 아빠의 모직 재킷을 고쳐 입으면 된다는 팁을 알려주셔서 시골집에 갔을 때 안 입으신다는 재킷 두 벌을 챙겨 왔다. 제법 묵직한 울 100%의 재킷이다. 예전 같았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스타일이라 선뜻 입기엔 좀 창피해서 언젠간 멋지게 리폼을 하겠다며 좁은 옷장 한편에 잘 걸어 두었다.


엄마 아빠는 원숭이 띠 동갑이다. 띠만 같을 뿐 외모도 성격도 참 반대다. 아빠는 170센티의 키에 거구라면 엄마는 150센티가 되지 않는 아담한 체형이다. 엄마의 아담한 체형과 오밀조밀한 얼굴이 참 닮고 싶었다. 아빠의 시원한 콧대와 엄마의 늘씬함 그리고 예쁜 외모는 오빠가 다 물려받았다. 그 덕에 언제나 인기 많은 남학생이었다. 그에 반해 내 얼굴은 엄마를 복사한 수준인데 엄마의 낮은 코와 아빠의 두툼한 입술을 닮아 만화 ‘달려라 하니’의 고은애와 거의 흡사하다.(다행히 목소리는 살았다.) 게다가 키도 골격도 크다. 어깨라도 좁다면 좋을 텐데 어깨가 참으로 광활하다. 엄마는 나이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탓에 종종 아가씨로 오해받기도 하고 나랑 다녀도 나를 조카로 보거나 심지어 동생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동생이라고 해서 엄마를 엄청 동안으로 본 것은 아니고 내 덩치가 커서 초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아가씨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슬픈 이야기다.) 오죽하면 아빠 송년회에 참석한 날 아빠와 어울리지 않은 깜찍한 외모의 엄마를 애인으로 오해해 본가에 전화를 넣어 사모님의 유무를 확인 한 직원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괘씸하고 얄미운 녀석들이다.) 할머니는 모르는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코치코치 캐물으니 잠깐 슈퍼에 갔다고 둘러대셨는데 그 대답은 흔히들 말하는 ‘세컨드’를 데려온 아빠로 한동안 회자되었다고 한다. 이것도 슬픈 이야기다. 아빠가 해명하시느라 힘들었을 것도 같지만 딱히 그런 건 무시하는 무뚝뚝한 분이다. 아빠의 성격을 표현하자면 울 100%나 면 100%만을 고집하는 분이다. 보수적이기도 하고 대장 스타일(나도 대장 스타일인데)이라 나와의 사이가 좋지는 않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집안에서 아빠와 말싸움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애교 따위는 없는 그런 딸이다.


“발 좀 세워봐”


“왜요? 이렇게?”


뜬금없는 요구에 발을 내밀었더니


“공주병은 아니구먼?”


어디선가 듣고 온 공주병 테스트였는데 귀여운 딸내미와 알콩달콩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춘기 소녀에겐 마냥 화가 나고 어색한 질문들뿐이었다. 그럴 때마다 오히려 어쩔 줄 몰라 톡 쏘아 대기 일쑤였다. 아빠가 타지에서 일을 하셨기도 했고 살갑지도 않아서 “아빠, 사랑해요”라는 말을 해본 적도 따뜻하게 안겨본 적도 없다. 서로 낯 간지러워 시도조차 해본 적이 없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그렇게나 무섭고 보수적인 아빠가 쫑알쫑알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나를 혼낸 적은 없다. 남자들이 나이를 먹으면 뒷모습이 그렇게나 안쓰럽다고 하는데 아빠의 강한 성격이 점점 부드러워지고 있다. 언제나 변함없을 것 같던 아빠의 뒷모습도 쓸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전에 못 부린 애교를 손주의 재롱으로라도 넘치게 보여드리고 싶다. (우리 아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지만...)  


계절이 바뀌어 겨울 옷을 꺼내는데 아빠의 재킷이 눈에 들어왔다. 이걸 입자면 어깨도 손보고 싶고, 옷가게 사장님처럼 엣지 있게 포인트도 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도 뭔가 아티스트 같고 센스쟁이 같고 그럴 것이라고 이 옷도 나도 더 돋보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난 김에 한번 걸쳐봤는데 세상에…. 요리보고 조리보고 또 봐도 내 옷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딱 맞았다. 어깨도 요즘 오버핏이 유행이니 그럭저럭 괜찮고 품도 딱이다.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우리 아빠 배는 술배라 불룩했는데 내 배가?? 의심은 넣어두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그 아빠에 그 딸이고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이 이 옷 한 벌로 어느 정도 설명이 되니까 말이다. 청바지에 입으니 그리 올드해 보이지도 않고 느낌 있다고 생각하며 (전적으로 내 생각이지만) 과감히 입고 나갔다. 남의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의외로 잘 어울리는 데다 편해 잘 입고 나왔다는 생각이 앞선다. 나에게 오버핏은 어디서 구하기도 힘든데 이렇게 아빠 옷을 입으니 '딱' 내 사이즈다 싶다.


“명품은 이게 명품이네 울 100%의 딱 맞는 핏이라니!”


이제 보니 재킷이 잘 어울리는 이유는 내 어깨가 아빠처럼 떡 벌어졌기 때문이다. 재킷이 잘 어울리니 뭔가 각이 사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결혼 전 영업직이었던 나는 슈트 입을 일이 많았다.


“슈트 정말 잘 어울려요”


 거래처 직원들의 말이 진심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소개팅할 때도 입사시험 볼 때도 원망 아닌 원망을 했었다. 작아 보이고 싶어 어깨를 움츠리고 다닌 적도 있지만 항상 핸디캡은 아니었던 거다.


아빠 옷이라 그런 걸까. 아니면 아빠와 내가 닮았다는 걸 인정해서 그런 걸까. 유독 나에게 딱 맞고 포근하기까지 하다. 올 가을 이 기분을 실컷 느껴야겠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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