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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봄 Nov 13. 2020

평범하지만 평균은 아닙니다.#04

받은 만큼 돌려드려요.

아침 일찍 대전에 가야 했다. 갑자기 차편이 마땅치 않게 되어 친구에게 역까지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거기에 아들의 등원까지. 산모교실부터 친구였는데 어찌나 사이가 좋은지 내가 수술하러 간 사이에 진통이 와서 병원에 갔는데 결국 수술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그 친구와 나는 하루 차이의 남자아이를 키우고 있다. 아들 둘 키우는 친구라 아침마다 전쟁일 텐데 쿨 하게 오케이 해줬다.

 자는 아이 깨워 우는 놈 급하게 옷 입히고 초코를 먹여 달래 일찍부터 움직였다. 아빠 차를 타면 신나거나 떼를 쓰는 극단적인 성격이다. 초보인 엄마가 운전하거나 다른 사람이 운전할 때는 울거나 소리 지르면 사고가 난다고 주의를 주었더니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말똥 한 눈으로 밖을 보고 있었다. 언젠가 앞에 타겠다고 떼를 썼는데 엄마가 운전한다고 하자 뒷좌석의 카시트에 앉아 얌전히 가겠다고 급 정색한 적도 있다. 목숨 소중한 것을 잘 안다.


역에 도착해서 인사할 새도 없었는데 손을 흔들어주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짠해서 혼났다. 기차에  몸을 싣고 꾸벅꾸벅 졸아가며 서대전에 도착했다. 연애 때 남편과 종종 데이트하던 곳이라 기분이 묘했으나 그런 감흥을 즐길 여유 없이 급하게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볼일이 예상보다 2시간이나 빨리 끝났다. 담당자들이 다 바뀌어 세상 친절하기까지 했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서둘러 택시를 타고 30분 후에 출발할 기차를 예매했다. 무언가 속전속결의 날이었다.

“25분 남았는데 안 늦을까요?”

“지하철 탔음 못가도, 택시 탔으니 한번 가봅시다. 그러지 말고 전주까지 그냥 택시로 가지 그래요?”

“서대전역에서 전주까지 기차 삯이 만원도 안 하고 더 빨리 도착하는데 기차를 타야죠 아저씨.”

아저씨는 멋쩍으신지 코를 훔치셨다.

“지하철 타면 늦는다고 하셨는데 택시 탔으니까, 늦으면 오늘 잠잘 때까지 아저씨 욕할 거예요.”

아침부터 운이 좋았던지라 분위기를 풀어볼 겸 아저씨에게 농담을 건넸다.

“아쿠, 그럼 안 되는데!"

"음, 저는 너그러운 사람이니깐 오늘 잠자기 전까지만요 ㅎㅎ”

“절대 늦으면 안 되겠구먼”

“아니에요. 11시 차 다음에 1시 차 있어요. 1시까지만 욕할게요.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주셔야 돼요!!”

“하하하. 알겠어요”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워졌다. 내 기분도 가벼워졌다.

“만약 안 늦고 도착하면, 오늘 아침부터 여러 사람한테 도움도 많이 받고 운도 좋아서 일도 엄청 빨리 끝났거든요. 제 행운이랑 기쁜 마음도 나눠 드릴게요!”

“아이고, 고마워라”

무슨 드라마 대사 같은 소리를 손발 오그라지는 줄도 모르고 잘도 해댔다.


간혹 농으로 여성 승객을 가지고 놀려는 아재들이 있다. 뜬금없는 불륜 이야기나 낯 뜨거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던가 연애한 번 해보자고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기사님을 만난 적도 있다. (따뜻한 분들도 참 많다. 그런 분들은 말수가 적으시지만) 남자들의 말도 안 되는 야한 농담 파악에 능한 나는 어설픈 농담 따위는 씨알도 안 먹히게 받아쳐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친구의 도움으로 아이가 무사 등원했고 순조로웠던 일처리 덕분에 마음이 너그러워진 날이기도 했다. 아저씨는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좋은 분이셨다.

순조로운 날이어서였을까. 바람도 볕도 너무 좋았다. 차창밖으로 보이는 조용한 도시가 마음에 들었다.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고 어디서 들은 것이 생각나 기사님께 말을 걸었다.

“대전은 살기 좋은 곳 같아요”

“대전의 부자들은 다 외국에 나가서 돈 쓰고, 소비가 죽어서 장사를 하면 망하기 일쑤예요.”

이래저래 모두들 힘든 건 같은 모양이다. 소비의 도시 전주가 부럽다고 하셨다. 택시 기사님들은 자식 이야기를 참 많이 하신다. 젊은이들이 타면 꼭 제 자식 같은 맘이 드시는 걸까? 기사님 아들은 서른 한살이고 곧 장가를 간다고 했다. 자기도 아들 하나라 ‘더 낳을 걸’ 하고 후회했다면서 다시 생각하라 신다. 하나만 낳는 것이 무슨 도리를 못하는 것도 아닌데 온갖 측은한 눈빛을 보내며 “하나는 너무 외롭잖아.”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할 말은 하는 타입인 나는

“물려줄 것도 없고 기댈 생각도 말고 각자 살기로 했어요.”

한마디로 내 형편과 다짐을 표현한 약간은 거친 대답으로 길게 이어질 출산장려를 잘라냈다.

이제까지 기분 좋았는데 괜스레 날을 세운 건가 싶어.

 “그런데, 우리 아들은 겨우 네 살이에요.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어 드렸다.


하나뿐인 아들이 결혼을 앞두고 있고 직장에서 3년 차라면 든든하기도 하고 걱정도 많으실 거다. 서른한 살은 참 힘든 시기였던 것 같다. 정말 그랬었다. 20대라면 용서되었을 행동들이 더 이상은 애교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책임감 있는 행동과 진지함을 가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었다. 서른한 살에 보수가 적어도 마음 편한 곳으로 이직을 했었다. 기대와 달리 돈 주는 곳은 모두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는 곳이라는 결론을 내린 나이이기도 하다. (똑똑한 척은 다해도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게다가 결혼이라는 큰 산까지 기다리고 있다면 본인의 역사를 새로 쓰게 될 중요한 시기 아닌가. 흰머리가 올라와도 언제나 어리게만 보이는 게 부모의 마음. 나도 깜냥에 4년 차 부모라고 어림짐작해본다.

무슨 드라마의 재기 발랄한 여주인공처럼 기합을 넣어

“서른한 살이면 한창 고민 많을 때예요! 많이 보듬어 주세요!! 아저씨 파이팅!!!!”

기차 출발 5분 전, 역으로 뛰어올라가며 문득

‘그런데 내가 택시비는 냈던가?’

오글거리는 멘트를 던지고 멋지게 내렸지만 진상고객으로 남을까, 순간 식은땀이 났다. 기차에서 카드 사용내역 문자메시지를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기사 아저씨도 기쁨 많은 날이 되시길. 그리고 서른한 살의 청년에게도 행복한 날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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