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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행 Dec 28. 2022

불이 흐르고 물이 고여있던

과테말라 안티구아, 티칼

 쿠바를 거쳐 도착한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커피와 활화산이 있고 싼 속소와 실속 있는 카페들이 즐비하다. 이런 매력에  여행자들은 장기간 안티구아에 머물며 스페인어를 배우고 남미로 출발한다. 

 안티구아에 도착해서는 일단 화산투어부터 떠났다.  갈라파고스의 이사벨라 섬에서도 화산지대를 둘러보았지만 폭발한 지 한참이 지난 검게 굳은 용암지대였고 이곳 안티구아의 화산은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폭발해서 아직까지 붉은 용암이 뜨끈하게 흐르고 있었다.

 화산 입구에서는 꼬마들이 나무 막대기로 깎은 지팡이와 마시멜로우를 팔고 있었다. (내려올 때 다시 돌려받으니 지팡이는 빌려준다는 게 맞는 거 같다.)  힘들 것 같아 지팡이는 하나 샀지만 몸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마시멜로우는 거절하고 지나갔다. 

 장사꾼 2단계로 말 타라고 끈질기게 달라붙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어린아이를 데려가는 우리 가족은 1순위 타깃이었다.  같이 투어를 탄 우리 팀 젊은이들과 거리가 자꾸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준이만 말을 태워 먼저 올려 보냈다. 준이라도 먼저 올려 보내서 다행이라며 힘들게 올라가는 우리 부부가 점점 뒤처지니까 먼저 가던 서양 청년이 뒤를 돌더니 ‘빨리, 빨리’라고 또렷한 한국말로 재촉했다.

‘헉, 투어버스에서 우리가 한국말로 욕한 거 없었나?’ 순간 뜨끔했다.

 한국에 살다 간 외국인들이 많아서 한국어로 흉보면 모를 거라 생각하다간 망신당할 수도 있다. 이 친구에게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영어를 가르쳤고 그때 번 돈으로 안티구아에서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한글은 원리가 쉬워서 뜻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안다고 했다. 한국인 여자 친구도 있었고 냉면이랑 순두부찌개의 마니아라고 하는데 한동안 못 만났던 한국인을 대신 만난 기분이었다. (본인은 채식주의자라서 냉면 고기는 먹지 않고 면과 국물만 먹었다고 하는데 냉면 육수가 고기 국물이라는 말은 차마 못 했다.) 

 좁고 검은 산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는데 갈수록 구름이 자욱해져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김이 무럭무럭 올라가는 게 보이더니 갑자기 눈앞에서 붉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저 감탄을 하고 있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은 가방에서 마시멜로우를 꺼내 막대기에 끼우더니 용암에 굽기 시작했다. 흐르는 용암에 마시멜로우를 굽다니, 아까 팔던 건 이런 용도였구나. 준비성 없는 부모 앞에서 어린 아들은 그저 부러운 눈으로 쳐다만 보고 있었다.

결국, 부정(父情)이 체면을 이겼다. 남편이 마시멜로우를 굽는 한 청년에게 아들 주려고 하니 한 개만 주면 안 되겠냐고 간곡히 부탁했다. 흔쾌히 '딱 한 개'만 내어주는 청년에게 받은 마시멜로우를 어린 아들이 너무 소중히 먹어서 준비성 없는 부모는 후회 속에서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마시멜로우에서 끝나면 좋았을 것을... 사람들은 배낭에서 꺼낸 소시지를 나무에 꽂아 굽기도 하고 팝콘도 봉지 째 구웠다. 

그때, 누군가 흐르는 용암에 종이를 던지니 화르르 불이 붙어 순식간에 사라졌다. 멀리 서 있어도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용암이란 단순히 돌 녹은 물이 흐르는 게 아니라 불이 흐르고 있는 거였다. 

가이드는 우리가 도착하기 얼마 전에 기자 1명과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1명이 이 화산에 빠져 죽었다고 하면서 용암에 아주 가까이는 못 가도록 제재를 했다. 얼마나 뜨거웠을까를 상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용암 앞에서 신기해하는 사람들 틈새에서 하얀 개가 한 마리 보였다. 이 높은 곳까지 어떻게 알고 왔는지 궁금했지만 화산의 열기로 따뜻하고 관광객한테 얻어먹을 것도 많으니 여기만큼 좋은 곳도 없겠다 싶었다.

넋 놓고 구경하는 사이에 조금씩 어둑해지더니 내려오는 길은 깜깜했다. 어두운 갈림길에서 지팡이를 짚고 절절매며 내려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머리에 플래시를 장착하고 내려간다. 어디서 이런 정보들을 얻었을까 궁금해했었지만 아마 우리만 빼고 다른 관광객들은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활화산을 봤다는 뿌듯함을 안고 내려오는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깜깜한 밤에 붉게 흐르는 용암을 보러 개미떼처럼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안티구아를 거쳐 티칼이 있는 플로레스로 향했다.

마야문명의 발생지인 티칼은 ‘영혼의 소리(Voice of spirit)’라는 뜻이다. 영혼의 소리가 들렸을지도 모르는 이곳은 2012년 지구 멸망설로 주목받고 있어 관광객이 늘었다고 했다. 마야문명 달력에 지구 멸망이 예언되어 있다는 설 때문이었다.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하지 않아서 티칼에 관광객이 조금 줄었을지도 모르겠다.)   유적지의 거대한 템플을 둘러보고 건축물 위쪽으로 올라가서 정글을 내려다봤다. 우거진 열대림이 구름처럼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우리 아래쪽엔 현지인 가족이 나란히 앉아서 이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가족이 함께 있는 뒷모습은 무언가 뭉클한 게 있다.

 설렁설렁 유적지를 둘러본 후에 가이드 아저씨에게서 마야문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독자적으로 마야문명을 연구해 왔다는 이 분은 마야문명의 달력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2012년엔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걸 알 수 있다고 했다.  대신 인류가 석유를 하도 많이 파내서 그 빈 공간에 물이 차거나 불이 나면 지반 전체가 무너지면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설득력 있는 이론을 갖춘 박식한 가이드였다. 팁까지 받고 헤어지면서 우리에게 맨 마지막 질문만은 안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런데 한국은 어디에 있니? 중국의 한 주인가?” 

한국인 관광객들이 몰려오면 어쩌려고 그러셨는지, 지금도 연구는 계속하고 계신지 궁금할 뿐이다. 

   마야문명은 우리를 플로레스로 이끌었고 플로레스의 커다란 호수는 우리를 떠나지 못하도록 잡고 있었다. 깊은 수심의 이 맑은 호수는 마냥 잔잔하고 한없이 고요해서 수심을 잊게 해 주었다. 동네 꼬맹이들과 같이 다이빙도 하고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호숫가 데크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수도 있었다. 급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앉아 있다 보면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갔다. 밥때가 되면 셋이서 도란도란 걸어가 현지 음식을 먹거나 '스이까'라는 뜬금없는 일식집에서 비빔면을 먹었다. 우리가 마신 맥주병이 늘어가고 준이가 모으는 병뚜껑 개수도 늘어났다. 대단한 것을 본 것보다는 이런 한적한 순간들이 여행의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플로레스를 떠나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과테말라에 화산이 폭발해서 과테말라 공항이 폐쇄됐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리가 떠난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역시 우린, 간발의 시간차로 화산 폭발을 피해 간 운 좋은 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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