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키토, 푸에르토 키토
에콰도르의 수도인 키토는 고산지대인 데다 적도가 지나가는 곳이다.
적도에서는 중력이 약해서 몸무게가 적게 나간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으니 키토에서는 적도 탑에 있는 저울에 몸무게도 재보고 적도 박물관에서 싱크대 배수구에 물 빼기, 날계란 세우기 등 과학만화에 자주 나올 실험도 해볼 수 있다. 적도 박물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슈렁큰 헤드(shrunken head)이다. 슈렁큰 헤드는 죽은 자의 머리 가죽을 벗겨 수증기에 쬐어 말린 주먹만 하게 쪼그라 붙은 얼굴을 말하는데, 현지 부족에선 존경받는 사람이 죽으면 슈렁큰 헤드를 만들어 장기 보관을 했다고 한다. 외부에 전시되어 있는 걸 볼 땐 그냥 나무늘보 얼굴 말린 것 같아서 별 감흥이 없는데 가이드가 금고에서 꺼내 보여준 것은 정말 생생해서 ‘악’ 소리가 나왔다. 슈렁큰 헤드가 암시장에서 유통이 되곤 해서 에콰도르 정부가 공식적으로 판매금지를 했는데 우리가 가기 얼마 전에 5개가 인터넷에 매물로 나와 문제가 됐었다고 했다. 슈렁큰 헤드는 당시 부족들에겐 지혜와 용맹함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겠지만 현재엔 끔찍한 풍습으로 받아들여진다.
키토에서는 적도라는 점 이외에도 아는 얼굴들이 많이 모였어서 기억에 남는다. 남미에선 한국인 여행자들이 적고 코스가 비슷해 자주 만나긴 했지만 볼리비아에서 만났던 힘센과는 벌써 세 번째 만남이고 페루에서 헤어졌던 남편의 후배 일행도 다시 만났다.
이곳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주로 20대가 많았는데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호칭이 문제였다. 나이가 많은 우리 부부를 부를 호칭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동성은 그냥 언니나 형이라고 부르면 되는데 이성일 경우엔 호칭을 정하는 게 정말 어려운가 보다. 남편의 경우엔 남편 이름의 이니셜로 BK라고 부르라 했더니 20대 여자 친구들은 BK라고 부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한국 남자 여행자들은 이모뻘 나이인 나를 부르는 걸 어려워했다. 나이가 많아도 결혼을 안 했으면 보통 누나라고 부르던데 애가 있으니 누나라고 부르기도 힘든가 보다. 그냥 편하게 내 영어 이름인 ‘앤’이라고 부르라고 해도 한국 문화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도 어색해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이 형수님은 양반이고 아주머니에, 심지어 사모님까지 있었다.
오히려 외국 친구들은 만난 지 얼마 안 돼도 이름을 부르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어 더 쉽게 친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 만났을 때 일단 나이를 물어봐야 실수하지 않고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호칭 없이 부르면 일정한 선 이상은 가까워지기 힘들고 언니라든지 형 같은 가족 관계에 해당하는 호칭을 정하고 나서야 친해질 수 있는 것 같다. 요즘엔 '00님'이나 '00 선생님'으로 예전보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호칭이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지만 좀 더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격의 없이 부를 수 있는 호칭이 필요한 시대가 온 것 같다.
키토에서 또 한 명 반가운 얼굴을 만났는데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만났던 오 사장님이었다. 한국식당에서 우연히 만나서 갈라파고스 여행도 추천받았었는데 그동안 여행 다니면서 만났던 한국인 배낭여행객들에게 밥 사주시느라 바빴다고 하셨다.
근사한 저녁도 대접받고 오 사장님 댁에 놀러 갔다. 오 사장님의 둘째가 준이 또래라 준이는 오랜만에 또래 친구를 만났다. 오 사장님의 아들은 스페인어와 영어는 잘하는데 한국어가 서툴고 준이는 한국어는 잘하는데 영어가 서툴렀다. 이들의 공통어는 영어가 아니라 만화책과 컴퓨터였다.
오 사장님 댁에서 준이가 새로 사귄 친구 방으로 직진해 만화책과 컴퓨터를 보는 사이에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거실벽에 있는 ‘그러거나 말거나’라는 문구가 큼직하게 새겨진 목각판이었다. 취미로 배워 새기신 거라는데 진정 고수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문구였다. 에콰도르에 이민 와서 온갖 경우를 다 겪어온 달관의 자세가 한눈에 드러났다. 우리도 ‘그러거나 말거나’를 마음에 새겨 유유자적, 초월적 삶의 자세를 지니리라 다짐하는 밤이었다.
키토 거리를 지나가다가 여행사 창문 앞에 붙어있는 푸에르토 키토에 가면 열대과일을 마음껏 맛볼 수 있다는 광고 문구에 혹해서, 반가운 얼굴들과 헤어져 우리 가족은 푸에르토 키토로 향했다.
고산지대인 키토에서 버스를 타고 산 아래로 계속 내려오면 정글이 있는 열대지역인 푸에르토 키토에 다다른다. 몇 시간 만에 고산 기후에서 열대기후까지 여러 기후를 체험할 수 있는 점이 에콰도르는 매력이다.
열대과일 체험을 위해 도착한 농장엔 매니저 부부와 아이들 6명, 개와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 웬만해선 싸우지 않을 것 같은 순하면서도 화목해 보이는 가족이었다.
이 날 농장에 묵는 손님은 우리 가족과 이스라엘 친구들 4명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이스라엘 청년들은 여행을 많이 다녀서 세계 어디를 가든 젊은 이스라엘 여행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이었던 이 친구들도 제대하고 9개월째 남미를 여행하고 있다는데 식욕도 왕성하고 시끄러웠지만 매니저 아저씨의 스페인어를 친절하게 통역해주었다.
첫날 저녁에 농장 매니저 아저씨가 카카오를 따서 안고 왔다. 카카오를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길고 울퉁불퉁한 겉껍질을 가르면 씨앗이 나오는데 씨앗을 그냥 먹기도 하고 볶아서 갈면 초콜릿이 된다. 에콰도르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카카오를 생산하는 지역이지만 가공기술이 떨어져 주로 카카오 빈 형태로 수출한다고 한다.
그날 저녁의 초콜릿 레슨을 따라가 보자.
일단 카카오를 갈라 씨를 꺼낸 다음, 카카오 씨가 탄다는 기분이 들 때까지 볶는다. 볶은 카카오 씨의 속껍질을 벗겨서 그라인더에 갈면 찐득하게 갈려 나오는데 이것이 초콜릿이다. 여기에 우유와 사탕수수 가루를 넣고 저어가며 졸인 다음, 틀에 부어 식히면 초콜릿 완성.
사탕수수 가루를 넣을 때 입을 모아 ‘더, 더’를 외쳤더니 초콜릿이 너무 달아지긴 했지만 이렇게 만든 초콜릿에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찍어 먹으면 천연 초콜릿 맛이 그대로 느껴진다. 복잡한 가공과정을 거치는 유럽 초콜릿 가게의 세련된 맛은 아니지만 고소하고 깊은 맛이 났다.
우리나라 텃밭에서 오이랑 상추를 따오듯이 이곳은 집 마당에서 바나나와 파인애플을 따 먹었다. 더 다양한 과일을 맛보기 위해서 농장 근처의 열대 농장으로 출발했다. 사나운 정글 개미가 많아서 장화를 신는 게 좋다고 했지만 준비성도 없고, 장화도 없는 우리 가족은 등산양말과 운동화로 무장했다.
농장은 우리나라 과수원과는 다르게 그냥 숲 속에 온 느낌이 들었다. 농약을 안치고 유기농으로 키우기 위해 여러 종류의 나무를 섞어 심기 때문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보았던 플랜테이션처럼 단일 작물만 심는 경우가 병충해에 훨씬 취약하다고 한다. 농장이든 사람 사는 사회든 다양함이 생존 가능성을 높여준다.
바나나와 람부탄, 귀하다는 노니도 보고 20여 종류의 과일을 직접 따서 설명을 듣고 맛보았다. 오렌지를 나무에서 바로 따서 윗부분을 뚜껑처럼 살짝 잘라내고 아랫부분을 손으로 쭈욱 짜서 마시면 천연 오렌지주스가 되었다.
우리 가족이 과일 먹어보러 여기 왔다고 하니 매니저 아저씨는 무척 미안해하면서 8월에 오면 훨씬 많은 종류를 먹어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8월에 푸에르토 키토에 다시 한번! 가능할까? (할 리가....ㅠㅠ.... 꿈꾼다면 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