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콰도르 과야킬, 갈라파고스
에콰도르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과야킬에 도착했을 땐 고산지대를 돌아다닌 후유증 탓인지 온몸이 쑤시고 아파 꼼짝을 할 수 없었다. 더위에 땀을 흘리면서도 몸속은 추워 이불을 덮을 수도 말 수도 없었다. 한참을 자다가 깼더니 방이 조용했다.
‘엄마, 아빠랑 장 보고 올게.’
침대 옆엔 준이가 냅킨에 쓴 메모가 있었다.
메모를 읽고 다시 잠이 들었다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일어났더니 남편과 준이가 죽을 끓여 놨단다.
밥과 죽의 중간상태인 죽(밥)과 요구르트가 들어간 오묘한 맛의 오믈렛, 깻잎 통조림이 전부였지만 먹고 나니 기운이 났다.
그럭저럭 내가 몸을 추스를만하니까 이번엔 준이의 감기가 심해졌다. 준이는 아기 때부터 감기만 걸리면 중이염에 걸렸는데 이번에도 귀가 아프다고 하는 걸 보니 중이염이 왔나 보다.
중이염은 놔두면 심각해지는 병이라 물어물어 병원에 갔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의사는 퇴근한 것 같았다. 친절한 현지인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약을 사들고 돌아가는 길에 가정집 문 앞에 조그맣게 ‘소아과’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약속시간을 잡고 다시 의사 선생님 댁에 갔더니 집안에 진료실이 있었다. 다음 여행지인 갈라파고스에서 수영을 못할까 봐 걱정을 했는데 약 먹으면 괜찮을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준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귀에 직접 넣는 약과 먹는 약을 처방받았는데 진료비는 미국 달러로 20달러였다. 이 동네에서 도마에 올려놓고 망치로 깨 먹는 커다란 게 4마리에 콜라랑 맥주까지 합친 가격이 8달러인 것에 비하면 아무리 게가 싼 동네라 해도 진료비가 지나치게 비쌌다.
여행 기간 중에 병원은 세 번 정도 간 것 같다.
콰야킬에서 준이의 중이염 때문에 한 번, 돌아오기 직전에 필리핀에서 남편의 열이 떨어지질 않아 걱정을 하면서 종합병원 갔다가 달랑 비타민씨 몇 알 처방받은 적 한 번, 마지막은 시리아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시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준이와 남편이 계속 설사를 했다. 같은 호텔에 묵는 친구들이 장에 좋다고 준 허브티와 가지고 다녔던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두 환자를 이끌고 병원에 갔더니 이름도 낭만적이게 ‘여행자의 설사병’이라고 했다. 나중에 만난 다른 여행자들도 시리아에 오면 꼭 이렇게 한 번씩 설사를 한다고 했다. 앓고 난 뒤에는 면역이 생기는지 뭘 먹어도 다들 괜찮다고 했다.
사실 떠나기 전에 많이 걱정되는 부분이 아프면 어떻게 하나이다.
출발 전에 예방주사도 챙겨 맞고 의사인 친구가 챙겨준 알약도 플라스틱 통에 칸칸이 챙겨다니긴 했지만 무리하게 일정을 밀어붙이거나 일교차가 많이 날 땐 심하진 않아도 몸에 탈이 났었다. 중이염, 고산병, 설사병, 감기가 대표적인 증상이었는데 한국에서 준비해 간 약보다는 현지 약이 잘 들었다. 약에도 신토불이가 적용되는 면이 있으니 미리 너무 걱정하지 말고 본인이 평소에 약한 부분에 대비해 미리 조제한 약이랑 영양제 정도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은 듯하다. 면역력을 기르는 게 최고라는 생각에 우리 배낭엔 참기름, 고추장 등 양념 패키지 옆에 비타민, 죽염, 볼리비아에서 산 마카까지 영양제를 가득 담은 비닐봉지가 한자리 차지했었다.
몸져눕느라고 과야킬을 즐기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안고 갈라파고스로 향했다.
갈라파고스는 공항에서부터 혼잡했다. 관광객들의 짐을 일일이 다 풀어서 검사하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에선 여행안내보다 주의사항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개껍데기나 식물을 채취하면 안 되고 쓰레기를 버려서도 안 되며 섬 사이에 생물을 이동시키지 않기, 등등.
섬에 들어가는 입장료도 비싸다. 외국인은 에콰도르인의 10배 넘는 돈을 내야 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갈라파고스에 오는 관광객들은 커다란 크루즈를 타고 여행을 한다. 섬 근처 바다에 크루즈를 정박해 놓고 스킨스쿠버를 하거나 작은 보트를 타고 와서 섬을 관광하는 식이다. 계산기를 한참 동안 두드려 보고 난 뒤에 크루즈 여행보다는 직접 섬으로 들어가는 편이 싸다는 결론을 내고 우린 산타크루즈 섬에 짐을 풀었다.
갈라파고스에서는 온통 거북이가 기어 다니고 핀치 새가 하늘을 덮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절에 서양인들이 와서 거북이를 잡아먹고 씨를 말려놔 거북이는 모셔놓은 곳이나 가야 볼 수 있었다.
이곳이 동물의 낙원임을 알려주는 건 물개와 마린 이구아나였다.
보통 이구아나는 초록색인데 반해 마린 이구아나는 화산재를 연상시키는 검은 회색이었다. 고양이보다 약간 작은 마린 이구아나는 어기적어기적 기어 다녔는데 이 모습이 우리가 낯선 곳에 왔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무척이나 과묵한 친구들처럼 보이는 마린 이구아나의 보호 때문에 이 동네 개들은 함부로 나다니질 못 한다.
마린 이구아나는 그래도 동물의 세계에 속해 있었지만 물개는 아예 이 동네 주민처럼 보였다. 동물원도 아닌데 물개가 생선 노점 아저씨 앞에 서서 생선 한 토막 얻어먹기를 기다렸다.
생선가게 구걸뿐만이 아니다. 갈라파고스 물개들은 바다 부표 위에서 낮잠을 자고 저녁엔 사람들 다니는 길거리에서 노숙도 한다.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다리 위에서 자고 있는 물개를 보면 마치 사람인 듯 이불이라도 덮어주고 싶어 진다.
우리 가족도 물개처럼 갈라파고스 바닷가로 매일 출근했다. 수영 좋아하는 준이의 성화에 하루에 두 번씩도 바닷가로 향했다.
준이에게 끌려 나간 어느 이른 아침 바닷가에서 가뿐하게 수영을 마치신 미국인 할머니를 만났다. 일단 물 한 병을 다 마시고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했다. 나도 건강하고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를 가지신 이 분처럼 늙고 싶다는 동경이 생겼다.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청정지역인 갈라파고스도 점점 훼손되고 있고 사람들이 내는 소음 때문에 갈라파고스 펭귄은 알을 못 나서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갈라파고스 펭귄은 몸집이 작고 예민해 보여서 펭귄 마니아인 준이에겐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갈라파고스의 하이라이트는 당일치기 플로리아나 섬 투어였다. 스노클링을 하는데 물개 6마리가 나타나 앞서가던 준이를 감쌌다. 물개들은 장난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해서 가끔씩 사람들이 수영할 때 신는 오리발을 살짝 물기도 한단다. 호기심에 찬 물개들이 몰려들어 나중엔 물개 30여 마리와 함께 수영을 했다.
무서울 정도로 맑고 파란 바닷속에서 커다란 식탁만 한 물개가 앞으로 쑤욱 지나갈 땐 오싹한 기분까지 들었다. 준이는 물개와 눈이 마주쳤다고 좋아했다. 미리 예상을 하지 못 했던 거라 깜짝 놀랄 만큼 기뻤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펭귄과 헤엄치던 볼더스 비치의 흥분이 되살아났다.
서비스처럼 본 열대어 무리는 지금도 환상처럼 떠오른다. 돌아오는 길엔 돌고래의 단체 점핑도 봤다. 여기에선 또 발에 파란색 형광 페인트를 칠해 놓은 것 같은 파란 발 부비와 부리 아래쪽에 빨간 주머니를 부풀리는 군함조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동물보다도 더 예쁜 건 바닷속 색깔. 아쿠아마린 색은 이런 색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청량음료 광고라도 찍어야 할 바닷물이었다. 우리만 보기엔 아까운,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푸른색이었다.
산타크루즈 섬을 구경하면서 항구 쪽으로 걸어가는데 어느 현지인 아저씨가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에서 왔다니까 큰 소리로 “너, 갈라파고스, 사랑해요!”를 외쳤다. 코이카(KOICA) 단원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태권도와 컴퓨터를 가르칠 때 한국어를 조금 배웠다고 했다. 갈라파고스에 있는 동안 한국인은 한 번도 못 만났지만 ‘너, 갈라파고스, 사랑해요!’라는 한국어는 이 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들었다. 왜 ‘나’가 아니고 ‘너’인지는 모르지만. 그 덕분에 시간이 지날수록 갈라파고스의 파란 바닷물이 생각나면서 ‘나, 사랑해요, 갈라파고스’를 읊조려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