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파라카스, 리마
나스카와 오아시스 지역인 이까를 거쳐 펭귄과 물개 서식지인 페루 파라카스로 향했다.
파라카스에 가기 위해 탄 택시는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차였다. 뒷면 유리창에 ‘00나이트 웨이터 홍길동’이 대문짝만 하게 붙어있고 핸드폰 번호까지 있었다. 이름으로 보건대 강원도에 있는 나이트클럽의 웨이터가 몰던 차였다. 한글이 적혀 있거나 말거나 차만 튼튼하면 되는 운전사에게 자랑스러움에 넘친 우리는 홍길동에 대해열심히 설명했다.
지금이야 K문화가 대세라지만 당시엔 방콕 야시장에서 ‘한곡어 속성'이라 당당히 적힌 한국어 학습책을 본적도 있고 (비닐로 덮여있어 내용은 못 봤지만 이 책을 산 사람은 ‘한국어’가 아닌 ‘한곡어’를 배우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었다.) 한국인이 거의 없던 에콰도르 과야킬 공항에선 ‘환영’이란 한글에 친구라도 만난 듯 반가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필리핀에서 버스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 등에 ‘그 성적에 잠이 오니?’ 가 프린트된 티셔츠였다. 한국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문구였는데 기념품으로 사고 싶을 정도였다.
어느덧 도착한 파라카스에서는 ‘가난한 자의 갈라파고스’란 별명에 맞게 저렴한 비용으로 물개나 펭귄 같은 야생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커다란 게가 들어있는 수프에 가리비 볶음밥, 광어 튀김까지 한끼에 다 먹어도 걱정없을 만큼 식당물가도 저렴했다.
도착한 날 단골로 정해논 식당의 젊은 종업원은 서빙하는 폼이 약간 느슨한 것이 여기 사람 같지가 않더니 여행하다가 잠깐 이 식당에 취직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그 직원이 안 보이길래 그만뒀냐고 물으니 영어가 안되는 주인아저씨가 머뭇거리자 주방에 있던 아주머니가 답답함을 못이기고 뛰쳐나오셨다. 화가 잔뜩 난 주인아주머니는 손가락을 하늘로 찌르며, ‘무초(많이) 디스코, 무초 디스코’라고 하셨다.
다음엔 디스코 안 추는 성실한 직원을 뽑으시라고 웃으며 식당을 나와 물개서식지인 바예스타스 섬으로 가는 투어를 떠났다.
바예스타스 섬으로 가는 길엔 바위산 위에 새겨진 커다란 촛대 그림인 칸델라브로(Candelabro)가 보인다. 높이가 180m에 가로 길이가 70m나 되는 나스카 문양의 연장선인데 멀리서 보기에도 심플하고 현대적이다.
칸델라브로를 지나자 하나, 둘, 물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정도야 아프리카에서도 봤는데 했더니 갑자기 물개들의 아우성이 머리를 흔들 정도로 크게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바위섬이 몰려있는 해안가에 수 천 마리의 물개들이 왕국을 이루고 있었다.
물결이 높아져 배가 물개 왕국 쪽으로 출렁출렁 다가갔다. 물개들이 모여 있는 바위 옆에 갔을 때 사람들은 물개 무리에 감탄했지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바위에 붙어있던 해삼이었다. 물개들이 해삼을 먹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맛있는 걸 먹고 산다면 이곳 물개들은 장수할 것 같았다.
먹는 걸 즐기고 갈라파고스로 들어가기엔 비용부담이 큰 여행자라면 파라카스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도 고산지대로, 사막으로 애 끌고 다니느라 몰골이 말이 아닌데다 피곤이 겹쳐서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선 카드 회사에서 반값 할인해주는 특급호텔에서 이틀 밤을 묵기로 했다.
예약을 위해 한국 카드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지구 반대쪽에서 걸어도 여전히 카드회사는 바쁜지 ‘지금은 연결이 지연되고 있사오니......’ 류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거의 10초도 안 되는 안내 멘트에 전화를 끊고 다시 몇 번을 걸었는데 다음 달에 전화 요금이 20만 원이 넘게 청구되었다. 통신사에 전화를 했더니 카드회사에서 안내 멘트만 들어도 전화 요금이 나오게 설정을 했기 때문이란다. 이런, 나쁜 XXX.
콩자반과 계란 프라이가 좋았던 한인 민박에서 1박 후, 별 다섯 개짜리 호텔로 들어섰다.
시외의 큰 호텔보다는 작아도 시내에 있는 곳을 선택했더니 이곳 손님들 대부분이 비즈니스맨들이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배낭을 멘 우리 가족은 겉돌아 보였다. 꿋꿋하게 들어갔더니 보송보송한 하얀 시트커버가 있는 침대에 주방시설, 그중에서도 욕조가 가장 반가웠다. 욕조에 몸을 푹 담그고 때를 밀었다.(때밀이 수건은 한국인 장기 여행자의 필수품이다.)
한인마트에서 사온 깻잎 통조림에 인스턴트 우동, 냉면, 비빔면까지 종류별로 끓여먹고 그야말로 푸욱 쉬었다. 남편과 준이는 기대에 차서 수영장을 찾아 나섰지만 비즈니스맨이 주요 고객인 호텔이어선지 수영장이 욕조만 해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며 돌아왔다.
그래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은 것은 아침 뷔페였다. 호텔조식을 먹을 때야말로 여행을 실감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했다. 준이는 다른 손님들은 손도 대지 않는 그라나디아라는 남미 과일을 5개나 먹었다. 아직까지 수입되지 않는 그리운 과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