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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니 Nov 08. 2022

19년째 태교 중입니다만...

4. 두 아버지 1

두 아버지 1     

          

누군가의 부모님 이야기를 읽으며 돌아가신 두 아버지가 떠올랐다.   

  

한 분은 내가 아빠라고 불렀던 친정아버지고, 다른 한 분은 아버님이라고 불렀던 시댁 아버지이다.     

친정아버지는 2년 전에, 시댁 아버지는 7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이들과 나의 이야기를 쓰는 와중에 문득 두 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 두 분의 특별한 사랑이 지금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오늘은 나와 친정아버지의 이야기다.     


우리 집은 아들이 귀한 딸부잣집이다. 친정아버지 형제도 딸 5명에 아들 1명이었고, 우리도 딸 4명에 아들 1명이었다. 그중 나는 막내고, 바로 위가 아들이다. 귀한 아들을 낳고 그만두셨을 것 같기도 한데, 나는 덤으로 태어난 듯하다. 그래서 어렸을 적 동네 어르신들은 나를 두고 다리 밑에서 널 주워 왔다라는 농담을 참 많이도 하셨다.


친정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20여 년이 넘게 하셨었다. 어렸을 적 불리던 나의 애칭도 이장 집 막내딸이었다. 많은 농사와 집안일은 거의 엄마 몫이었고, 아버지는 마을의 축제며 동네 대소사로 늘 바빴다. 농사를 짓는 마을이라 절기마다 돌아오는 동네 축제에서 농악대를 인솔하여 꽹과리도 치시고, 노래도 잘하시고. 나름 풍류를 즐기는 분이셨다. 읍내 면 소재지며 동네에서 아빠는 사람 좋기로 소문이 났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꽤 무뚝뚝하셨고, 다정한 스타일도 아니셨다. 집에서는 간단한 의사소통 외에 대화다운 대화를 한 적이 별로 없으셨고, 집안의 귀한 아들로 대접받던 아들에게도 특별히 살갑지 않으셨다.     


하지만 막내딸인 나에게는 다르셨다. 마을 회관에서 일을 보고 계실 때 찾아가더라도 사탕 하나 정도는 꼭 챙겨주셨고, 엄마 몰래 용돈도 많이 주셨다. 밤에 동네 지인 집에 부모님이 놀러 가실 때도 나를 꼭 데리고 다니셨다. 늦은 밤 돌아오는 길에는 제법 클 때까지도 막내딸을 업고 오셨다. 언니들이나 오빠는 아빠와 이런저런 사소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나와는 늦은 밤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수사반장 등’ TV 프로그램을 아빠 품에 들어가 함께 보며 수다를 떨었다. 중학교까지 나는 부모님과 함께 잤다. 밤에 잘 때도 엄마와 아빠 사이는 내 차지였다.  내 방이 있었어도 두 분의 품이 좋아 꼭 안고 잤다. 지금 나와 우리 아이들이 안는 걸 좋아하는 건 다 나름의 내력이 있었던 거다.     


나는 학교에서는 수줍고 소심했지만, 집에서는 명랑한 수다쟁이에다 개구쟁이였다. 아마도 그건 아빠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도 허허하며 웃어주시며, ‘우리 영이는 뭐든 잘할 거야. 우리 똑똑이 나중에 무엇을 하려나 라는 식의 이야기를 자주 해주셔서였던 것 같다.    

 

우리 딸이 태어나고 커가면서 남편에게 부탁했던 말이 있다. 당연히 남편은 우리 딸을 사랑하겠지만,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무한대로 아이를 믿어주고 사랑을 말로 표현해달라는 거였다. 어쩌면 아버지의 표현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쉽게 포기하지 않는, 노력하면 될 거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아버지는 언니들과 오빠에 대한 사랑을 겉으로 꺼내지 못하셨지만 늦게 낳은 막내딸에게는 그 마음을 가감 없이 꺼내셨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말과 눈으로, 몸짓으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아이들에게는 직접적인 표현의 크기가 곧 사랑의 크기가 된다.     

지금은 곁에 안 계시지만 어렸을 적 표현해주셨던 아버지 사랑 덕분에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나를 사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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