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급 사회복무요원 1년 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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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연재일은 4월 14일 월요일입니다.
앞선 글(링크)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23년 7월부터 사회복무요원 근무를 시작했다. 한 초등학교 특수학급에서 장애 학생 활동을 지원했다. 교감 선생님은 임용을 준비하는 나를 배려해 주셨고, 다른 선생님들도 나를 존중해줬기에 쉽게 적응했다.
이 학교는 장애아가 많은 학교였다. 특수학급에서 수업을 듣는 학생만 11명이었다.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들으며 특수교육 대상자로 관리를 받는 학생도 10여 명이나 돼, 특수학생만 20명이 넘었다. 덕분에 나는 다양한 장애아동과 함께할 수 있었다.
나는 23년 8월부터 25년 2월까지 시각장애인 학생(이하 S라고 부르겠다.) 한 명을 전담으로 도맡았다. 중간중간 다른 자폐아나 지체 장애아 수업을 돕기도 했지만, 주 업무는 S를 돕는 것이었다. 눈이 안 보이고 고관절이 불편한 S의 일반학급 수업에 따라 들어가서 S의 학습을 돕고 이동과 기타 행동을 도와주는 게 나의 업무였다.
1.
S는 착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초2까지도 앞이 보였었기에 글자를 알고 있었으며, 어릴 때 사물을 봤던 기억이 있어 뭔가를 설명할 때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심성이 고와 말도 잘 들었으며, 수업 시간엔 발표를 적극적으로 하는 훌륭한 아이였다. 오며 가며 마주치는 어른들께 인사도 잘하고, 선생님들도 늘 칭찬하는 그런 아이였다.
그렇다고 모든 면이 다 예쁘지만은 않았다. S는 착하지만 동시에 이기적인 아이였다. 정확하게는 사회성이 떨어지고 눈치나 주변의 분위기를 읽는 능력이 매우 떨어졌다. 무엇보다 아쉬웠던 점은, 자기를 지목해서 직접 이야기하지 않으면 절대 행동하지 않는 점이었다. S는 남들이 다 하는 일을 하는 법이 없었다. 모두가 S를 배려한답시고 S가 제 역할을 하지 않더라도 S의 일을 대신 해줬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장애인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S는 고맙다고 말할 줄도 몰랐다. 고맙다고 하라고 시키면 잘했지만, 절대 먼저 고맙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루는 베트남 여행을 다녀온 반 친구가 아이들에게 선물로 간식을 돌린 일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고마워~’라고 하며 간식을 받았지만, S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어? 뭐야 이거? 맛있겠다.’ 하는 반응이 전부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S에게 ‘S야, 고맙다고 해야지.’라고 타일렀다. 그러자 S는 ‘네? 제가 왜요? 그냥 주는 거 아니에요?’라고 대답했다.
S의 모습을 보며 반두라(Bandura)의 관찰학습 이론이 떠올랐다. 반두라는 어린이들은 타인의 행동을 관찰하고 모방함으로써 학습한다고 주장했다. 직접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해야 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다른 아이가 하는 모습이나 다른 아이가 선생님에게 지도받는 모습을 보고 따라 배운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시각장애인인 S는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비슷한 사회적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할 기회가 없었다. 들을 수는 있지만 상황을 볼 수 없으니, 온전한 관찰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친구가 간식을 받으며 ‘고맙다’고 하는 장면을 눈으로 관찰하지 못했고, 이를 따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S는 자연스럽게 뭔가를 받으면 고맙다고 해야 한다는 사회적 행동을 습득하지 못했다.
2.
S의 공부를 돕는 건 내 중요 임무였다. 점자책이 있기는 했으나 S는 점자에 서툴렀다. 겨우 한 달 점자를 배운 나보다 읽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서 S가 교과서를 읽기보다는, 내가 옆에서 설명해 주는 게 주가 됐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고 학생들의 학습활동이 시작되면, 나는 S의 옆에서 차근차근 아까 들은 내용을 확인시키며 이해 못 한 내용을 더 쉽게 풀어서 설명해 주려 애썼다.
S는 질문에 쉽게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아는 내용을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했으나, 모르는 내용을 물으면 절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어요’, ‘생각 좀 해볼게요’라고 하면서 시간을 잡아먹기 일쑤였다. 그 말이 나오면 절대 먼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답답했다. ‘모른다고 이야기하면 내가 설명하고 넘어가면 되는데, 왜 저렇게 시간을 잡아먹을까?’ 하며 화가 났다. 내 불만은 짜증이 묻어난 말투와 목소리로 드러났다. S가 대답을 거부하거나 ‘생각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한숨부터 나왔다. 어떨 때는 아이를 닦달하며 ‘모르면 모른다고 이야기하라고!’ 하며 채근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새에 S는 점점 위축됐다.
하루는 S에게 물어봤다.
“S야. 내가 니 답 틀린다고 혼내는 거 아니다이가. 맞재?”
“네. 그건 맞죠.”
“근데 왜 모르겠는 질문에는 그래 대답을 안 하고 계속 머뭇대는데?”
“….”
“대답해 좀 주면 안되나? 쌤은 네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게 더 편해. 그라믄 다시 설명하고 넘어가면 끝이다이가. 근데 네가 말을 안 하면은, 진도가 늘어지고, 쌤도 네 답 기다리재. 근데 니가 대답을 안 해. 그라믄 니가 상대방이라고 생각해 봐. 상대가 대답을 안 해. 화가 나? 안 나? 화가 난다이가.”
“….”
“S야. 대답 안 할 거가?”
“생각하고 있어요.”
S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참고 기다렸고, S는 겨우 대답했다.
“제가 모른다고 하면 쌤이 한숨 쉬잖아요. 그래서 대답하기 무서워요. 한숨 좀 안 쉬면 안 돼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다. 난 S의 잘못된 답변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설명을 잘못 이해하거나 틀린 답을 냈을 때 한숨을 내쉰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 행동이 아이를 위축시키고,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교사는 학생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하고, 정답이 없는 문제를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나는, 정작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 학생을 상대로 바로바로 대답하지 않는다고 한숨을 쉬었다. 내 철학의 진정성이 의심되는 순간이었다. 임용 면접 때는 그렇게 열심히 학생을 생각한다고 말했던 나지만, 현실은 정답을 맞히는 훈련밖에 시킬 줄 모르는 게 나였다.
감정 조절도 부족했다. 참된 교사라면 인내심을 갖고 학생이 스스로 대답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은근하게 답을 강요하거나 아이의 말문을 막아서는 안됐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깊은 회의감이 몰려왔다. 임용시험을 합격한 직후 계속해서 내 머릿속을 맴돌던, ‘나는 교사로서 부적합하다’는 목소리가 다시 내 안에서 들려왔다.
3.
S는 제 짐을 들고 다닐 줄 몰랐다. 모든 짐을 내게 넘기려고 했다. S는 점심시간이면 부모님이 싸주신 과일을 들고 급식실로 갔다. 몸에 맬 수 있는 물통 가방에 함께 들어있어서, 자기가 제 몸에 매면 됐다. 첫 점심시간, 급식실로 가면서 S는 ‘예전 선생님은 이거 들어주셨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리며 혼잣말했다. 혼잣말이었지만 분명 내게 물통을 들어달라는 말이었다. 나는 즉시 S의 태도와 표현을 지적했다. 첫 번째로, 원하는 사항이 있으면 예전과 비교하는 게 아니라 ‘선생님 이거 들어주세요’라고 명확하게 말하라는 점, 두 번째로는 네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S는 납득하는 듯 보였으나, 이동할 때 자기 짐을 넘기는 행동은 사라지지 않았다.
S는 직접 일을 시키는 게 아니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옆에서 뭘 하든 말이다. 선생님이 집에 가야 하니 책상 서랍을 정리하라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고, 대청소를 해야 하니 책상을 뒤로 밀어야 한다고 해도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의 말을 따라 하라고 해도 따라 하지 않았고, 체육 시간에 모두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서지 않았다. ‘왜 선생님이 시키는데 가만히 있냐’고 여러 번 물어봤지만, S는 끝내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S는 그 어떤 단체 지시도 따르지 않았다. S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문득, S만 이런 건지 아니면 장애인은 모두 이런지 궁금해졌다.
S네 학년은 유독 장애인이 많은 학년이었다. 자폐아가 한 명, 다리가 불편한 지체장애인이 한 명, 상체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말이 어눌한 지체장애인(이하 Y라 한다)이 한 명, 그리고 시각장애인인 S까지 네 명의 장애인이 있었다. 일과시간 중 복도를 오가거나 현장체험학습에 따라가서 장애인 학생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Y가 눈에 띄었다.
Y는 뇌병변장애가 있어서 상체를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고 언어가 조금 어눌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뿐, 다른 아이들의 말을 이해하고 생각할 능력이 있었다. Y의 담임선생님은 최대한 Y가 모든 행동을 스스로 하게 시켰다. 그래서 청소 시간에 대걸레를 잡고 복도를 닦는 Y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를 S에게 말했더니 ‘쌤, 그건 Y니까 하는 거죠. 전 그런 거 못 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Y라고 즐겁게 모든 일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학교에는 특수교육실무원이라는 전문 지원 인력이 배치돼 있다. Y는 여자아이였기에, 같은 여자인 실무원 선생님이 주로 맡아주셨다. Y도 마찬가지로 가방을 들기 싫어 실무원 선생님께 넘기고, 청소를 하기 싫어 실무원 선생님께 넘기곤 했다. 실무원 선생님께서는 선뜻 이를 받아줬지만, 담임선생님은 단호했다. 담임선생님은 ‘Y. 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잖아. 그런데 왜 계속 (실무원) 선생님께 네 일을 떠넘겨?’라며 아이를 혼내며 혼자 일을 하게 시켰다.
Y는 따로 시키지 않아도 친구들이 줄을 서면 같이 줄을 섰다. 말하지 않아도 자기 짐을 들고 다녔고, 병뚜껑을 따지 못할 때도 혼자서 따려고 애를 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싶더라도 타지 않았고, 청소 시간이 되면 자기도 빗자루를 집어 들었다. 혼자서 못하는 일이 있을 때는 도와달라고 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하는 아이였다.
S는 미묘하게 달랐다. S는 선생님이 줄을 서라고 해도 함께 줄을 서지 않았으며, 자신의 짐을 들지 않았고, 요구르트가 나오면 자연스럽게 내게 건넸다. 혼자 지팡이를 써서 걸을 수 있는데도 계속해서 내 손을 잡기를 원했고, 걸어 올라갈 수 있을 때도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친구들이 청소할 때는 난 청소할 수 없다며 가만히 있기만 했다.
S는 자기가 그 일들을 할 수 없다고 항변했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았다. 모두 S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몇 번 시켜봤더니 곧잘 했다. 바닥 청소는 힘들었지만, 자기 책상 위와 아래를 청소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이처럼 S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늘 가만히 있으며 누가 시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무도 S에게 일을 시키지 않았다. 그렇게 대우받은 S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건 습관이 됐다.
나는 어디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고민했다. 물론 S와 Y는 장애의 내용과 정도가 달랐지만, 둘은 정신이 멀쩡하고 일반인처럼 사고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한 명은 장애가 있지만 자기의 일을 하고, 다른 한 명은 장애가 있어서 ‘전 그거 원래 못하는데요?’라고 말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4.
어쩌면 장애인을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 ‘쟨 장애인이니까 못 할 거야’라는 고정관념일 수 있다. 장애인은 그 이름처럼, 일상생활에 장애가 있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 S나 Y처럼 정신이 멀쩡하다면 더욱 그렇다. 물론 이들은 장애가 있어서 일반 학생들처럼 혼자서 모든 걸 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가르쳐주고 익숙해지면, 충분히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아이들이다. S는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분명 많았다. 하지만 S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도 일단 못한다고 말하면서 피했다.
S와 Y는 뭐가 달랐을까? 물론 둘의 장애 내용과 정도, 성향, 가정환경 등 다양한 영향이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인은 아예 할 수 없는 일이 많지만, 지체장애인은 어렵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점도 이유일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교육 방식에 조금 더 집중했다. 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는 어른이 ‘쟨 장애인이니까 배려해 줘야 해’하며,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대신해 주거나 예외를 마련해주면 아이들은 거기에 익숙해진다. 가만히 있어도 일이 처리되고, 남들 다 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나는 장애인이니까’ 혼나지 않는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과한 배려가 아이의 자립심을 꺾는다. 남들이 다 해주는 상황이므로 스스로 할 필요를 못 느낀다. 능동적인 자세가 키워지지 않는다.
해보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장애인도 스스로 할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또 스스로 해야만 한다. 물론 장애인들에게는 적절한 도움과 지원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일상생활에서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런데 장애인은 하지 못할 거라는 우리의 생각과 장애인을 챙겨줘야 한다는 우리의 배려가 오히려 장애인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그런 면이 있었다. S가 스스로 하게 시키고 지켜보는 건 너무 답답했다. 눈이 안 보이는 S는 모든 일이 서투르고 느렸다. 한눈에 상황을 보지 못하고 하나하나 만져봐야 하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모습이 갑갑했기에 가끔 나는 S가 할 일을 대신 해주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 펼쳐놓은 점자책과 책상을 정리하거나, 이동수업이 있을 때 특히 그랬다. 그러자 S는 점차 수업이 끝난 후 책상 정리를 스스로 하지 않게 됐다. 원래는 할 수 있는 아이였다.
어쩌면, 가만히 S가 하도록 내버려뒀으면 S는 점점 더 빨리 책상 정리를 했을 것이다. 나중에는 지우개 가루를 스스로 쓸며 책상 청소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다리기 갑갑하다는 이유로 성장의 기회를 박탈했다. 어쩌면 학생의 가능성과 성장을 제한하는 건, 교사의 낮은 인내심과 불필요한 개입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는 비단 특수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능동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뭔가 해보는 경험을 계속 제공해야 하고, 본인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옆에서 늘 일을 대신 해주면 그 아이는 가만히 있어도 모든 일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줄 아는 이기적인 아이가 된다. 본인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뭐든지 다 해주는 과잉보호는 이기적인 아이와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아이를 만들 수 있다. 이건 내가 공익 생활을 하며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었다.
장애인 학생들을 1년 9개월 동안 도와주며 겪은 여러 경험들은 내 생각의 지평을 넓혀줬다. 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장애인에게 불친절한 여러 인프라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됐다. 의외로 장애인에게 친절한 사회의 분위기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장애인 문제에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직접 피부로 경험해 보니 사고의 폭이 전보다 넓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교사로서 나의 부족함과 입만 살아있는 나라는 존재의 한심함도 절실히 실감했다. 나는 감정 조절이 부족했고, S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어나가려고만 했다. 인풋과 아웃풋이 똑같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내가 원하는 아웃풋이 아닌 S의 답에 한숨을 푹푹 내쉬며 S의 말문을 막아버렸다.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시각장애인이라 학업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 S상대로도 그랬으니, 내가 현장에서 일반 학생들에게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그 점은 나를 더욱 위축시켰다.
학생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이 학생의 성장을 방해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 역시 같은 행동을 했다는 사실도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마음속으로 S와 Y를 비교하면서 ‘저렇게 배려한다고 할 일을 빼주는 게, 혼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아이를 만든다’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답답하다는 이유로 S가 해야 할 일을 계속해서 대신해 줬다. 마음속으로 지금의 S를 만든 사람들을 흉을 봤으나, 나 또한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자각한 순간 내가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일상생활에서 조바심을 잘 내고 인내심이 부족한 나의 성격적 특성은, 학생을 이끄는 어른의 위치에서도 똑같이 흘러나왔다. 자존감이 낮은 나는 더더욱 교사로서의 자신감을 잃었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 선생님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생각은 조금 더 선명해졌다. 학생의 성장을 돕는 선생님은,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격려하는 선생님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에 인내심을 가지고 학생들을 기다려줄 수 있는 선생님이다. 어설픈 배려나 통제는 학생의 성장과 의욕을 꺾어버린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S에게는 그런 어른이었다. 내겐 인내심과 S를 향한 믿음이 부족했다.
다음 편에서는, 역시 사회복무요원 때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다만 시점이 조금 바뀐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벗어나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 된다. 장애학생 보조로서 교실 뒤에서 바라본 교실 풍경은 교단에서 바라본 것과 썩 달랐다. 그건 나를 교사와 행정가의 길에서 더더욱 고뇌하게 했다.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계속 교사로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국가가 내게 강요한 1년 9개월의 속박 속에서 나는 정말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속도와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사람이 되거나, 그런 사람을 키우는 제도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다음 글에서도 역시,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던 시간의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연재일은 4월 14일 월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