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사회복무요원, 그리고 교사로서 1년 9개월
이 브런치북은 격주로 월요일에 연재됩니다.
다음 연재일은 5월 5일 월요일입니다.
지난번(링크)에 이야기했듯, 이번 편에서도 사회복무요원의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지난 글의 시점이 장애인을 도와주는 사회복무요원이라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이었다면, 이번 글의 시점은 교실에 ‘없는 존재’로 있는 3인칭 관찰자로서의 시점이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나는 시각장애인(이하 S) 학생을 전담으로 도맡았다. S는 국어, 수학만 특수반에서 수업을 듣고 다른 과목들은 원래 반에서 수업을 들었다. 나는 S가 원래 반으로 올라갈 때 수업에 따라 들어가서 수업 듣는 걸 도왔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도 학생도 아닌 사람이 교실에서 수업을 들으며 아이들을 관찰하는 묘한 위치가 됐다.
아이들은 처음엔 내게 관심을 줬지만, 내가 ‘선생님’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자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나는 있는 듯 없는 듯 행동했고, 아이들도 내가 있는 걸 의식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의 민낯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교생이나 시간강사를 하던 때, 교단 앞에서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그 이야기들을 따로따로 쪼개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023년, S의 담임선생님은 그해에 발령받은 신규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을 휘어잡는 요령이 다소 부족한 여자 선생님이었다.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참 좋아했고, 그 반은 유독 활발했다. 언뜻 보면 자유분방하고 신나는 즐거운 반이었지만, 문제는 수업시간에도 그런 상태가 지속된다는 거였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적절하게 통제하지 못했고, 자연스럽게 수업은 똑바로 진행되지 않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는 안 샐리 없었다. 체육이나 음악 시간에도 아이들은 다른 반에 비해 말썽이었고, ‘유독 N반은 더욱 그런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교과 선생님들의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장면을 보며 내 첫 시간강사 생활이 떠올랐다. 왜 고연차 선생님들이 일단 아이들을 억누르고 통제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당장 수업을 진행해야 하니까 말이다.
나는 S 외에도 다른 아이의 수업에 들어가기도 했다. 중증 자폐아인 W네 반 선생님은 경력이 엄청난 선생님이셨다. 교육청이 선발한 강사로 뽑혀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강의를 하고 다니시던 분이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을 정말 잘 통제하고 잡아놨다. 수업은 별문제 없이 잘 진행됐고, 아이들도 수업을 잘 따라오고 학습 내용을 잘 기억했다. 하지만 W네 반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이 반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W네 반은 유독 말이 없고 조용했다. 좋게 말하면 차분했고, 나쁘게 말하면 억눌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아이들이 자유분방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는 아이로 컸으면 한다. 제 개성을 살리고 행복한 삶을 살게 돕는 것이 교육의 본령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교과 수업을 통해 기본 상식과 특정한 사고방식을 학습하는 것도 중요하고,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법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다. 중간의 어딘가에서 선을 잡아야 할 텐데, 대부분 선생님들은 W네 담임 선생님과 같은 길을 선택하시는 것 같다. 그 반 아이들의 뭔가 아이답지 않은 분위기를 생각할 때마다 기분이 심란해진다.
교실 뒤에서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아이들의 세력 관계와 생태계가 보였다. 누가 반에서 제일 잘 나가는지, 누가 학급 분위기를 주도하는지, 어떤 그룹이 형성돼 있는지 등이 한눈에 들어왔다. 교단에서 수업을 할 때는 당장 수업을 진행하느라 급급해서 아이들의 수동적인 반응을 관찰하는 게 다였다. 뒤에서 차분히 보니 그간 보이지 않던 역학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만 보면, 아이들이 대놓고 공격하거나 따돌리지는 않지만, 은근히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다. 교사가 직접 나서서 이를 언급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아이의 존재를 무시하며 함께 놀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게 다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시는 존재 자체를 깔아뭉개거나 하는 식의 무시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없는 사람처럼 대한다는 의미이다. 불가피하게 수업시간에 같이 활동을 해야 하면 활동은 같이 한다. 하지만 말은 섞지 않는다. 역할을 분담해서 해야 하는 활동만 딱 하고, 활동이 끝나면 바로 피했다. 싫어서 같이 놀지 않겠다는데 방법이 없다. ‘나 얘 싫어서 같이 놀기 싫어요’라는데 강제로 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야말로 그레이존이었다.
하나 생각건대, 존재를 무시하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 것이 물리적 폭력보다 더 잔인한 행동이다. 우리는 상종조차 하기 싫은 사람이 상대방이더라도, 표정관리를 하고 사회생활을 한다. 그게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기본 예의이다. 나는 교사로서 학생들이 싫어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법을 배웠으면 좋겠고, 싫어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방법이 마땅찮았다.
여러 반을 들어가 봤지만, 반마다 이런 아이는 꼭 하나씩 있었다. 각 반 담임선생님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취하지 못했다. 상황을 파악했으나 별다른 수를 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수업과 업무에 치여 파악조차 못했을 수도 있다. 나 또한 계속 고민해 봤으나 뾰족한 방책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내가 담임이 돼도 반에 저런 아이들은 분명 있을 텐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만 깊어진다. 임용 면접 준비할 때는 학생 상담으로 학생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지면서, 학급 분위기를 잘 조성해서 해결한다고 이야기했다. 이제 와서 보니 전혀 현실성 없는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S와 W 외에도 나는 많은 장애아동의 수업과 식사를 도왔다. 주로 지체장애인 K이나 지적장애인 J, A, 자폐아인 L과 밥을 먹었고 다른 지체장애아 E의 체육 수업에 들어갔다. 그럴 때마다 신기한 점은, 어린아이들은 장애인을 별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저학년 아이들은 순수해서 악마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었다.
E는 1학년이었는데, 지체장애가 있어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해서 보행보조기기를 끌고 다니는 아이였다. 하루는 E가 “나도 계단 걸어갈 수 있어!”라고 한 모양이었다. 순수한 1학년 친구들은 E를 데리고 계단에 가서 보행보조기기를 뺏어버렸다. 그러고는 계단을 걷게 했는데, 이 모습을 내가 발견했다. 내가 화들짝 놀라서 제지하니, 아이들은 “아니요 선생님! E가 걸을 수 있댔어요! E, 네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하며 억울해했다. 언뜻 보면 괴롭힘 같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정말로 순수하게 E의 말을 믿어서, E가 계단을 걷는 걸 보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정말로 E가 계단을 걷는 장면이 궁금하니까 말이다.
다른 에피소드도 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친구들과 운동장에 나가 노는 게 E의 1학년 2학기 루틴이었다. 열심히 뛰어가지만 보행보조기기 때문에 느린 E를 보고 한 친구는 "E! 굳이 그거 안 끌고 오고 버리고 뛰어오면 더 빠르잖아! 그냥 버리고 빨리 와!"라며 귀여운 핀잔을 두기도 했다. 어쩌면 장애가 뭔지 정확하게 인지를 못했기 때문에 나온 행동들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어린 친구들은 장애인과 자신을 서로 다른 존재로 인지하거나 선을 긋지는 않았다.
이런 현상은 자폐아나 지적 장애인들한테서도 나타났다. 1학년 지적장애인 J와 자폐아인 L은 각 반의 인기스타였다. 친구들은 장애인들을 귀여운 동생 보듯이 챙겼다. 여자아이 한둘이 항상 J나 L의 손을 잡고 다니며 모자란 것들을 챙겨주고 도와줬다. 마치 누나와 동생 같은 느낌이었다. 지적장애 A의 경우에는 아예 전담반까지 구성했다. 반 친구들이 직접 조를 짜서 여럿이서 A를 특수반에 데려와주고 또 원래 반으로 데려가주다 보니, 전문 보조 인력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어느샌가부터 달라진다. 아이들은 나이를 먹어가며 자폐아나 장애인을 싫어하고 멀리하기 시작한다.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반응을 보인다. 4학년 1학기까지는 크게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5학년 2학기가 되면 이미 장애인은 아이들 사이에서 기피 대상이 된다. 어디에서부터 잘못되는지 모르겠다. 왜 없던 편견이 갑자기 생기는 걸까? 처음 아이들은 장애인과 나를 구분 짓지 않는데, 어디선가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기 시작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소집해제한 지금, 나는 중학교 2학년 역사를 전담하고 있다. 우리 학교에는 특수반이 2 학급이나 있다. 그런데 2학년에는 장애아가 없어서 내 수업에서 장애아동을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내년이면 나도 담임을 맡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 학교에 있다 보면 장애인과 일반 학급 친구들이 섞인 수업을 반드시 진행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진행하고 교육해야 할지 고민이 크다. 어떻게 해야 순수하던 초등학교 1학년 시절로 아이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까. 뭐가 아이들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게 한 걸까?
소집해제를 한 달 여 남긴 3월 초, 5급 공채 1차 시험이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정말 높은 점수로 넉넉하게 시험에 합격했다.
합격했더니 새롭게 고민이 생겼다. 워낙 스트레스라 불면증이 올 지경이었다. 나는 처음에 9월에 발령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처음에 준비하던 5급 공채를 준비했다. 그런데 2월에 알고 보니, 내 발령일은 소집해제 직후인 4월이었다. 5급 공채 시험은 평일과 주말을 모두 사용해 5일이나 친다. 평일 시험일이 많기 때문에, 직장 병행 수험생의 경우 연가 사용이 필수적이다. 이게 내 발목을 잡았다. 3일이나 연가를 내고 수업에서 빠지는 걸, 교장 선생님이나 교감 선생님이 인정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공익을 하던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께 여쭤봤다. 비록 학교급은 다르지만 관리자급 선생님의 의중이 궁금했다. 그러자 '연가 못 쓰게 하면 시험 포기 안 할 거야?' 하며 웃으셨다. 맞는 말이었다. 당장 교사로서 해야 할 일을 잘하며 신임을 얻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라는 조언을 들었다. 내가 평소에 일을 잘하면 별 일 아닌 일일 거고, 내가 일을 못하고 교직에 관심이 없는데 그러면 큰 문제가 될 거라며 말이다.
교장선생님은 고민을 털어놓은 나에게 당신의 이야기도 조금 풀어놓으셨다. 덕분에 교장, 그리고 교육청 장학관이라는 '관리자의 고충'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고위직으로 갈수록 자율권과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높은 관리직 공무원도 그리 권한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최종 결정권자는 공무원이 아니라 선출직이라는 사실을 간과했다.
직급이 높아진다는 건 선출직과 가까워진다는 거다. 그럴수록 공무원의 전문성을 살린 '내 일'을 하기보다는, ‘민의’를 대변하는 선출직의 공약을 현실로 옮기는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관리자 본인의 권한과 책임은 늘어났으나, 실질적인 자율성은 더 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훨씬 더 자유롭게 '어떤 교육이 옳은 교육인지'를 고민하고 실행할 수 있는 건 교사였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듣다 보니, 5급 사무관이 내 꿈에 적합한 직업인가 하는 고민이 새로이 생겼다. 교사는 압도적인 자율성이 부여되지만, 행정직 공무원은 어느 직급에서나 결국 결정권 없이 위에서 지시한 일을 해야만 하는 도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교사로서 아이들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게 정말 세상을 바꾸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취업을 했지만, 진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먼저 통제와 자유 사이에서 고민했다. 적절한 통제가 없으면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다. 따라서 아이들이 기본 상식과 사고방식을 습득하지 못하고, 법과 질서를 지키는 법도 모르게 된다. 하지만 과한 통제는 아이들의 개성과 자유를 억누르고 감정이나 의견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로 만든다.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두려움이 더 먼저 들었다. 게다가 나는 시간강사 시절에 그런 선을 찾지 못해 한 번 실패한 사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다음 문제는 교실 내에서 회색 존재가 돼버린 아이들이다. 분명 어느 반에서나, 아이들이 함께 놀기 싫어하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그 아이에게 원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부분은, ‘아무도 나와 놀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의 이유는 아닐 거라는 거다. 그리고 혹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싫은 상대방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존중하고 사회적 인격으로서 대우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방관했다. 아직도 별다른 미봉책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는 ‘너와 나’를 가르는 선이 생기는 이유를 고민했다. 분명 어릴 때의 아이들은 장애인과 자신을 선 긋고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언젠가부터 갑자기 장애인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여긴다. ‘나와 다른 존재’로 여기는 순간 ‘다른 존재’는 이상하게 여겨지고 혐오나 기피의 대상이 된다. 비단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와 '우리가 아닌 것'을 구분하는 그 선은 어디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해야 할까. 이 역시 마땅한 답이 나오지 않아서 나는 점점 더 괴로워졌다.
교실을 지켜보면서, 교사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운 직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나는 교사로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차마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교사로서 너무 모자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더욱 커졌다.
교장선생님은 이런 내 고민을 듣고는 웃으며 말씀했다.
이메다야. 제일 위험한 선생님은, 지가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선생이다.
본인이 모자라다고 생각하면서 본인의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계속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더 나아질 여지가 있다. 결국은 더 나아진다. 하지만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하고 이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절대 발전이 없다. 그런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가만히 정체돼 있다가 결국 좋지 못한 교사가 된다. 좋은 교사는 본인의 모자람을 인식하고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성장하는 교사다. 그게 교장선생님 말씀의 요지였다.
교장선생님의 말씀은 꽤 큰 힘이 됐다. 나는 분명, 세간의 인식보다는 교사를 더 어렵고 무거운 직업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내 교직관은 성직관이고 나는 거기에 한참 모자라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너무나 오만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당연히 완벽한 사람이어야만 해'하는 오만을 말이다. 정신과 의사가 얘기한 것처럼, 조금 더 겸손할 필요가 있다. 내 마음속에서 나는 당연히 완벽한 사람이어야 하나보다. 그러니까 완벽하지 못한 나 자신이 부적절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어쩌면, 내가 5급 공채에 끝끝내 붙지 못하더라도, 좋은 교사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나는 소집해제를 맞이했다.
다음 글은 드디어 현재 시점의 이야기입니다.
첫 출근과 첫 수업, 학기 중간에 발령받은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연재일은 5월 5일 월요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