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강사 4개월, 기쁨보단 아픔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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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8월 8일, 과사에서 전화가 한 통 왔다. H고등학교에서 급하게 역사와 통합사회 시간강사를 구다는 내용이었다. 집에서 거리는 좀 멀었으나 바로 하겠다고 했다. 그때는 시간강사와 기간제 차이가 뭔지 몰랐다. 수업을 시켜준다니 일단 하겠다는 마음이었다. 역사는 기간제를 구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게 웬 떡이냐?' 했다.
먼저 기간제와 시간 강사 설명하겠다. 학교에 근무하는 '선생님'은 세 종류로 분류된다. 교사, 기간제 교사, 강사 세 종류다. 교사와 기간제 교사는 교원으로 묶이고 강사는 교원은 아니다. 강사는 공무원 연금을 내지 않고 프리랜서 세금 3.3%를 떼이며, 교사가 아니기에 과외나 학원 강사를 겸직해도 문제가 없다.
시간강사는 행정 업무를 맡지 않고 온전히 수업만 한다. 다만, 경우에 따라 출제나 생기부 작성 등 업무는 맡을 수도 있다. 수업을 할 때만 돈을 받으므로 공강 시간에는 자유롭게 학교를 나가도 되며 본인의 수업이 끝나면 즉시 퇴근한다. 학교 스포츠 강사, 방과 후 강사 등과 신분상 다를 바는 전혀 없다. 다만 교원자격증 보유자라서 정규 수업시간을 '혼자서 온전히' 책임지는 강사라는 점이 차이점이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 수업시간은 주 9시간. 1학년 통합사회 6시간, 3학년 한국사 3시간이었다. 3학년 한국사는 수능 문제를 20여분 풀어준 다음 자습을 시키고, 통합사회는 출제나 생기부 업무 없이 오롯이 수업만 하는 조건이었다. 주 3일 출근해 하루 2-4시간 수업하고 퇴근하는 일정이었다. 이 시간표로 내 시간제 선생님 생활이 시작됐다.
1학년 통합사회 수업은 퍽 재밌었다. 주변 사람들은 전공과 다른 수업을 한다는 나를 걱정했다. 하지만 난 앞편에서 말했듯 전공에 흥미가 떨어진 상태였다. 오히려 통합사회가 더 재미있었다. 학창 시절 사회탐구 수업 들은 기억이 아직 남아있기도 했고, 행시 공부하며 얻은 지식도 도움 됐다. 게다가 내용이 어렵지 않아서 수업 준비가 어렵거나 부담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학생들이 재밌어할까, 더 많은 내용을 얻어갈까 하는 생각에 수업 준비가 즐거웠다.
학생들은 새로 온 선생님에게 많은 관심을 줬다. 내 졸업일이 고등학교 2학기 개학일보다 1주일 뒤였던 지라, 아이들은 1주일 간 선생님이 오지 못해 자습을 했다. 그동안 '대체 누구길래 개학했는데 안 오지?' 하는 궁금증이 쌓였다고 했다. 처음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질문 폭탄이 날아왔다. 교생 때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난 교생 때 본 현구쌤을 따라서 태블릿으로 수업을 진행했는데, 노트북 없이 맨몸으로 들어오는 모습도 신선했단다. 아이들은 내게 MZ 선생님이라며 웃었다.
나는 이런 초반 관심이 끊기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수업에 쓰는 PPT 한 구석에 귀여운 캐릭터를 넣고 학생들의 취향을 저격하길 바랐는데, 첫 번째인 오버액션 토끼는 놀라울 정도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루피 PPT를 만들었고, 이게 인기를 끌어서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또, 열심히 사교적으로 먼저 말을 걸고 다니면서 완전 E 같다는 평가를 얻어내기도 했다.
나를 향한 관심은 수업으로도 이어졌다. 고1이라 내신 경쟁이 끝나지 않아서, 다들 수업을 열심히 들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설명을 이해하려 열심이었다. 교무실로 찾아와서 질문을 하는 아이도 있었다. '이거 시험 나와요?' 하는 맥 빠지는 질문도 있기는 했다. 그래도 다들 배우려고 노력하고 질문에 잘 대답해 주는 모습이 너무 예뻤다. 열심히 듣는 모습에 신나서 열심히 수업을 준비했다. 통합사회 시간이 즐겁고 기다려졌다.
모든 수업이 순탄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1학년 남자반이 고비였다. H고는 남녀 공학이지만 분반으로 운영하는 학교였다. 내가 수업하는 1학년 5개 반은 여자반이고 마지막 한 반이 남자반이었다. 남자반은 야생 그 자체였는데, 현실과 인터넷 커뮤니티의 경계선이 있다면 여기겠구나 싶었다. 내가 앞에 있든 없든 개의치 않고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DC나 펨코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을 순화 없이 그대로 사용하곤 했다. 이걸 어떻게 지도할까 고민하던 나는 쉽지만 교육적이지는 못한 방법을 택했다. 아이들을 설득하기보다는 화를 내며 부정적 단어들을 잠재웠다.
남자반은 여자반에 비하면 수업시간도 잘 지켜지지 않았고 멋대로 불쑥불쑥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내게 맞먹으려 들고 덤비는 학생도 있었다. 여자반에 비해 수업을 듣지 않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을 하는 학생 수도 더 많았다. 내가 화를 적절하게 내지 못하고 시작할 때 선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자반 수업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1학년 남자반은 약과였다. 힘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3 한국사 수업은 괴로웠다. 투명인간 체험이 따로 없었다. 첫날, 선생님이 들어왔는데도 학생들은 태블릿만 들여다보았다. 출석체크를 위해 이름을 불러도 아무도 이어폰을 벗고 대답하지 않았다. 경험이 없던 나는 거기서 선을 긋고 화를 내는 대신, 직접 가서 하나하나 이름을 묻는 선택지를 택했다. 학생들의 귀에서 이어폰을 빼게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를 놓쳐버렸다.
20분쯤 기출문제를 풀어주고 30분쯤 자습을 줬는데, 20분 수업조차 듣지 않았다. 성실한 학생들은 수학 문제를 풀거나 인강을 봤고,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유튜브와 인스타 릴스를 봤다. 반마다 한 명 정도 내 수업을 들어주는 학생이 있을 뿐이었다. 나는 오직 그 친구만 바라보며 수업을 했다. 하지만 개인 과외가 아니었기에 목소리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크게, 모두를 대상으로 설명하고 질문해야 했다. 그렇게 20분 동안 수업을 이어갔다.
3학년은 전반적으로 결석이 잦았다. 한 반 26명 중 4~5명씩은 늘 결석하는 것 같았다. 결석자도 일정한 게 아니라 늘 바뀌었다. 가끔 유일하게 내 수업을 들어주는 아이가 결석하는 날에는 허공에다 수업을 해야 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데 나 혼자 수업하는 건 정말 쉽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벽에다 대고 외치는 기분이었다. 모멸감과 자괴감이 느껴졌다. 교실에 들어가는 게 두려웠다. 오늘도 벽을 보며 수업해야 할까 하는 걱정에 3학년 수업 직전만 되면 분위기가 축 늘어졌다.
뭐라 하소연한 적도 없는데, 내 고저차가 눈에 뜨였던 것 같다. 한 선생님은 내게 '모든 학교가 이렇지는 않고, 이 학교만 유독 그렇다.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위로했다. 시험 붙고 다른 학교 가면 다를 거라며 말이다. 난 웃으며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사실 많이 실망했다. 3학년 한국사 수업은 내게 많은 무력감을 안겨줬다. 1학년 수업 6시간에서 많은 에너지를 얻었지만, 3학년 수업 3시간에서 얻는 부정적인 감정이 이를 상쇄했다. 즐겁다는 생각보단 괴롭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3달이 지난 12월 초, 1학년 기말고사가 끝났다. 시험이 사라지자 수업 진행이 안 됐다. 나는 수업을 하려고 했으나 학생들은 따라와 주지 않았다. 교무실 선생님께 어떡할까 여쭤보니, 진도는 다 나가는 게 좋지만 수능 과목은 아니니까 필수는 아니라고 하셨다. 그래도 교과서 진도는 다 끝내야 한다는 일념 하에 수업을 진행했다. 간식 공세와 '이 진도 다 끝나면 뭘 하고 놀겠다' 하는 공수표를 던져가며 어떻게든 교과서 진도를 다 끝냈다.
그러면서 이 학생들도 점수 때문에 내 수업을 들었구나, 내 수업이 좋은 수업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의욕이 한 풀 꺾였다. 내 전공인 역사는 중학교 발령이 절대다수인데, 내신이 안 중요한 중학교에서는 아무도 내 재미없는 수업을 듣지 않으리라는 부정적 생각이 나를 휘몰아쳤다.
12월 28일, 마지막 수업일과 함께 내 첫 출근이 끝났다. 그러고 바로 며칠 만에 임용시험 결과가 나왔다. 별 공부를 하지 않은 탓에 전공 과락을 맞고 탈락했다. 임용 시험은 과락이고, 한 번 해본 '교사 체험'은 부정적인 기억이 더 강렬했다. 즐겁고 행복했던 밝은 순간들이 더 많았지만, 적지만 강렬한 괴로운 기억이 나머지를 뒤덮었다. 내 머릿속 시간강사 시절은 생기 없는 무채색으로 색칠됐다.
나는 역시 교사로서는 자격이 없구나, 재미있는 수업을 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강해졌다. 내가 하는 수업은 모두 다 고3 한국사 수업처럼 될 것 같았다. 벽과 이야기하며 평생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졸업까지 한 마당에 취업은 해야 했다.
5급은 반쯤 포기했고, 교사는 적성이 아닌 것 같았다. 7급이나 9급은 자존심이 따라주지 않았다. 이렇다 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나는 다시 22년 3월처럼,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멍하니 지내기 시작했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상태로, 뭔갈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득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른 채 죄책감만을 쌓아가며 누워있었다.
그렇게 4달이 지나 23년 4월 중순이 됐다. '이러고 살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잦아질 때쯤, H 고등학교 사회 선생님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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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는 임용시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