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마법같은" 교생실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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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2월 26일, 5급공채 1차 시험(이하 psat, 피셋). 시험 사흘 전에 코로나에 확진되는 바람에, 격리 시험장을 신청하기 위해서 보건소와 시청, 인사처에 전화를 돌리느라 혼이 났다. 1년 중 가장 먼저 치는 국가시험이라 코로나 확진자의 격리 시험 매뉴얼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격리 시험장에서 시험을 쳤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다. 언어논리 과목에서 50점을 받으면서 침몰했다. 50점이라는 점수가 주는 임팩트는 엄청났다. 피셋 후 3, 4월은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보냈다. 자기 비하가 늘었고, 시험에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이 사라졌다. 게임이나 유튜브도 하지 않고 잠을 자거나 멍을 때리며 두 달을 보냈다.
이 직전까지 나는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일기장에 감정을 쏟아내는 게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20년에는 일기장 공책을 3권이나 쓸 정도로 열심이었다. 하지만 피셋 직후부터는 일기도 거의 쓰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했다. 정말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22년 5월에 쓴 일기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해가 5달 반이나 지난 지금, 나는 올해 며칠을 살아 있었나? 일기를 썼는지 여부가 내가 하루를 알차게 보냈는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피셋 이후의 나는 정말 살아있던 게 맞는지 의문스럽다." 그만큼 이 시기 내 정신상태는 메롱이었다.
페인이 된 나는 대학 수업은 쌩까고 나가지 않았으나, 교생 실습은 피할 수 없었다. 5월, 교생의 계절이 됐고 나는 운 좋게 걸어서 출퇴근할 수 있는 학교에 당첨됐다.
나는 꽤 운이 좋았다. 담당 선생님들은 교과를 불문하고 다들 우리를 많이 배려해 주셨고 한 명의 동등한 교사로서 존중해 주셨다. 복장 제한이나 엄격한 규율도 없었다. 교과교실제를 실시하는 학교라서 나는 한 장소에서 편하게 수업을 준비할 수 있었고, 교생선생님들의 활발함에 기가 빨릴 때 대피처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학생들도 우리를 매우 반겨줬다. 코로나가 끝나 첫 전면등교인 데다가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교생이라 그런 것 같았다. 열렬한 관심이 다소 부담스러웠지만 그렇게 싫지는 않았다.
수업은 힘들지만 재밌었다. 끄덕끄덕 하며 질문에 열심히 대답해 주는 학생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학생들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봐주니, EBS에 출강하는 명강사가 된 것 같았다. 학생들과 떠들고 잡담하는 것도 재미있었고, 체육대회 예선으로 진행하는 축구 구경도 즐거웠다. 우승 상품은 빅파이 두 박스였는데, 한 사람 당 두어 개 돌아갈 그 빅파이가 뭐라고 아이돌 응원하듯이 응원하는 여자 아이들이 귀여웠고, 경기에 지고 풀이 죽어서 수업에 반응조차 하지 않는 남자아이들도 귀여웠다. 교생 생활은 썩 맘에 들었다.
특이한 게 있다면, 같은 수업이더라도 반마다 분위기가 좀 달랐다. 같은 사람이 같은 내용을 수업하는데도 수업이 다르다니 참 신기했다. 4반 수업은 무척 만족스럽게 잘했는데, 우리 반인 1반 수업은 잘 안 됐다. 마지막 우리 반 수업을 끝내고 나니 꽤 울적했다. 우리 반이라 가장 잘해주고 싶었는데, 가장 깔끔하지 못했다. 씁쓸하게 수업을 반추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우울해하는 건 정말로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감정 때문일까, 아니면 '학생들에게 열성인 나'를 연기하고 있는 걸까.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나는 교사로서 열정과 자질이 부족한가 싶었다.
마지막 날은 다소 상투적인 작별 행사가 있었다. 교생들은 학생들에게 작별의 인사(또는 편지)와 선물을 전달하고, 학생들은 롤링페이퍼나 칠판을 꾸며서 인사하는 식이다. 솔직히 우리 반 애들의 준비가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아마 별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뭔가 가득 적힌 롤링페이퍼와 칠판을 보는데,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역시 나는 교사 적성은 아니구나, 생각했다.
학교 선생님들과의 인사도 모두 마친 후, 운동장에서 교생들끼리 마지막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타 전공 교생 선생님들과는 친해지지 못한 상태라 별 감흥은 없었다. 교생들끼리 하하 호호 웃으며 기념사진 찍는 걸 뒤로 하고 스탠드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이 터지자 순식간에 감정이 올라왔다.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웠다. 말이 없는 친구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이야기를 더 해볼걸.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마다 가서 학생들과 더 놀 걸. 수업 시간에 욕심을 좀 더 버릴걸. 이제야 나도 용기가 생기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은데,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슬펐다. 혹여나 내게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 하더라도 OO중의 이 학생들에겐 더 이상 그럴 수 없다는 게 너무 미안했다.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어 홀가분하다는 다른 교생 선생님들 대화를 듣자니 그 말이 너무 야속했다. 학생들은 보잘것없는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해 줬는데, 나는 그만큼 못해준 것 같아서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느껴져서 울었다.
나는 교생실습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 나는 예전에 역사 교사가 되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역사 과목이 좋았고, 멘토링 활동도 꽤 재미있어서 역사교육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 수업은 내 기대와는 달랐다. '역사'에 대한 수업도 '역사 교육'에 대한 수업도 없었다고 느꼈다. 고등학교 역사 수업이 조금 더 깊고 넓어졌다는 느낌이었다. 특별한 인사이트를 얻지 못했고 시험도 대개 '아는 대로 쓰시오' 식의 암기 시험이었다. 전공 수업은 학기를 거듭할수록 재미 없어졌고 나는 출튀나 무단결석을 반복했다. 시험은 백지를 냈고 과제는 선배들의 과제를 받아 약간 수정해서 내는 식이었으니 학점도 바닥을 쳤다.
교사가 된 후도 걱정이었다. 교사는 많은 사람과 긍정적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직업인데 거기에 자신이 없었다. 교사는 동료 선생님과 수백여 학생들과 친하게 지내야 하는 직업이다. 행복한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학생들과의 친한 관계가 급선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거기 자신이 없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거는 성격도 아니고, 재미있는 사람도 아니다. 게다가 염세적이고 비관적이라 우울한 기운을 풍기니 어느 학생이 나를 좋아할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학생들과 관계가 좋지 못한 교사가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에서 나를 무자격자라고 결론 내렸다.
그런 내게 교생실습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교생실습 당시 역사 선생님(하지만 내 지도교사는 아니었다.)인 현구쌤(닉네임)의 표현을 빌리자면 "참 마법같은 경험"이었다. 나는 교사란 학생들에게 항상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성인에 가까운 존재여야 한다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으로 결함이 있는 나는 교사가 돼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교생실습 동안, 학생들이 교사에게 특별한 에너지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완성된 인간인 교사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이끄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에너지를 주고받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학생들과 함께라면 나도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나은 교사가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다시 현구쌤의 이야기인데, 선생님도 교생실습 전까지는 다른 길을 고민하셨다고 했는데, 실습 4주 간의 좋은 기억 덕에 교사의 길을 정했다고 한다. 현구쌤은 교사들 대상으로 연수도 다니고 수업자료도 활발하게 공유하며 선생님들의 선생님 역할을 하며 멋지고 즐겁게 교직생활을 하고 계신다. 한 달 동안 지켜본 선생님은 정말 교직생활이 행복하고 적성에 맞아 보였는데,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어쩌면 나도 선생님처럼 교사로서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 끝에, 나는 일단 임용을 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잡기 위해 '교사 체험'을 결정했다. 난 학기가 꼬여 8월에 졸업했는데, 졸업하자마자 기간제를 구해서 학교에서 수업을 해보기로 했다. 그러면 정말로 내가 교사로서의 자질과 능력, 적성이 있는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교단을 향한 나의 여정이 시작됐다.
여담으로 상담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교생은 책임을 지지 않는 자리죠. 직업이 되고, 책임이 생기면, 그때는 또 느낌이 다를 수도 있어요. 그래도 이메다님이 스스로 즐겁게 일하고 생활하는 경험을 해보셨다는 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굳이 교사가 아니더라도 말이에요. '나는 행복하게 일할 수 있으니까'라고 믿을 수 있잖아요.
이메다님한테 좋은 시간이 된 것 같아서 기쁘네요.
내가 앞으로 계속 교사로서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선생님의 말처럼 교생은 내게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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