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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와일라잇 Jan 12. 2024

내향인의 이중생활

혼자서도 잘해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만의 의식을 좋아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집까지 백 걸음씩 묶어서 세면서 몇 걸음 걸었는지 세면서 돌아오기. 질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재미난 귀갓길 놀이였다. 아무도 안 보는 길을 걸을 때면, 오늘의 내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며 걸어오기.  짐 캐리가 나온 <트루먼쇼>라는 영화가 나오기도 전이었는데 늘 전능한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하며 혼자 정성 들여 노래를 불렀다. 목욕탕에서는 뜨거운 열탕과 차가운 냉탕에 들어가서 혼자 100세기를 하며 즐거워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선발고사가 있던 경기도 일산에 살았다. 선발고사를 앞두고 마음에 압박이 심해졌는지 밤마다 가위에 눌리는 일이 잦았다. 그때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주기도문’ 외우기. 혼자서 주기도문을 외우면 왠지 모르게 귀신이 물러간 것 같은 기분과 누군가 나와 함께 해주는 것 같은 편안함이 좋았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다시 다니게 된 교회에서 Q. T 아침 묵상을 배웠다. Q. T란 말 그대로 quiet time (조용한 시간)의 줄임말로 아침을 기도와 성경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방법을 배우고 한 두 번씩 읽고 말씀을 보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 그 재미에 빠져 매일 묵상을 했고 그 생활은 대학 생활까지 6년을 이어졌다. 누가 검사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성적이나 보장된 무언가를 얻는 것도 아니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나의 과거를 더듬어 보니, 무언가가 좋아지면 누가 뭐래도 빠져드는 경향이 있었나 보다.


 2019년, <아티스트 웨이>라는 책을 읽다가 저자가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모닝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혼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매일이 즐거웠다. 하루하루 나를 알아가는 재미에 글을 써나갔다.


 12주의 과정, 84일을 쓰고 나자 문득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글쓰기를 공유하는 기분은 어떨까?


 한 커뮤니티 카페를 통해서 만난 멤버들과 매일 글쓰기를 해나갔다. 모닝 글쓰기가 1년이 넘어갈 무렵, 함께 독서모임을 하던 멤버의 요청으로 모닝 글쓰기 모임을 열었다. 그렇게 함께 한지 4년. 모닝 글쓰기 5년 차가 되어간다.


모닝 글쓰기를 시작할 무렵에는 코로나와 휴직이 이어지면서 글쓰기가 쉬이 이어졌지만 요즘은 모닝 글쓰기보다는 하루 한번 글쓰기를 하고 있다.


INFP 여인들의 글쓰기 모임에서도 100일 글쓰기를 했다.  우리 모임의 특색 있는 활동 중 하나이다. 우리는 보통 하루 한번 글쓰기를 한다. 그리고 그 글 전문을 카페에 공유한다.


그 전의 홀로 글쓰기와 차이가 있다면, 내 글에 제목을 붙이고 사람들과 공유한다는 점이다. 모닝 글쓰기에서는 글 내용을 공개하는 인증은 하지 않았고 매일 글을 쓰는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했다.


 매일마다 누군가에게 공개되는 글을 쓴다. 나에게는 그 점이 더 글을 글답게 성장시켜 주는 과정이 되었다.  특히, 신뢰할 만한 이에게 내 글을 공개하는 과정은 일기장에 혼자 글쓰기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이지만 편안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다. 그렇게 2년 동안 꾸준히 글을 썼다.


“어떻게 아무도 안 써도 혼자 꾸준히 100일 글쓰기를 할 수 있나요?”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내향인이라는 점이다.


나는 내부로부터 오는 욕구에 반응하는 내향인이다. 글쓰기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을 받거나 인정을 받는 일, 또는 돈을 버는 일로 이어졌다면 오히려 글쓰기를 지속하기에 큰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그 묘미를 스스로 느꼈다. 그 재미와 유익이 내 삶을 새롭게 하는 걸 느꼈다. 그 덕에 꾸준히 쓰게 되자 자연스레 습관이 만들어졌고, 누가 뭐라고 하든 그 자체가 가지는 매력이 커서 꾸준히 글쓰기를 할 수 있었다.


멤버 중에 거의 유일무이(?)하게 꾸준히 100일 글쓰기에 성공한 비결은 결국은 홀로 느끼는 즐거움과 몰입의 시간이다.


비단, 나만의 일일까? 인프피 글쓰기 친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좋아하는 일들로 자신의 삶을 가꾸는 모습이 일상이다.


꾸준히 고전독서 및 글쓰기 모임을 이어온 지앵님.역시 본인이 느끼는 기쁨과 보람에 반응하며 이 낯선 제주 땅에서 낯가림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소모임을 꾸리고 즐거움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비결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누고픈 마음, 나누는 기쁨 덕일 것이다.


 TED 100일 스터디를 10기까지 이어오고 감사일기 쓰기 1000일을 앞둔 시온님 역시 TED를 통해 영어 공부와 성찰을 하는 기쁨, 감사일기를 쓰며 나눈 기쁨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시온님이 나눠준 기쁨이 커서 여전히 TED프로젝트를 기다리는 수많은 팬들이 있다. 함께 감사일기를 수년째 쓰는 친구들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여는 이색 독립 서점 ‘수민문화’를 운영하며 제주에서 열리는 북토크라면 기쁨으로 어디든 달려가는 니콜님도, 남들이 보기엔 맞지 않는 계산기를 가진 사람이다. 독립 서점 운영의 고됨과 어려움보다는 ‘책 이야기’ 나누는 기쁨으로 지속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다정한 니콜님 부부가 두 손 벌려 환영하는 <수민문화>의 오픈일에는 온기와 생기가 서점에 꽉 채워진다.


 ‘잘팔작프’의 리더인 온비님도 ‘엄마’가 되며 느꼈던 다양한 생각들과 성찰을 나누기 위해 ‘마마 오티움’ 프로젝트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년에는 독립출판으로 책도 내셨는데 그 주제 역시 ‘엄마’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다. 2023년 그 공부를 위해, 홀로 미국으로 다녀오는 용기 있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중심에도 역시 가족과 엄마, 의미 있는 것들을 향한 애정이 있다.


돈과 성과가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우리는 내향인이다. 어쩌면 내향인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시간을 만드는 사람들, 조용해 보이지만 내 세계를 가꾸는 사람들. 떠밀려 오는 취향의 파도 앞에서 아무 말 못 하지만 퇴근 후 내 집에서는 오롯이 나의 취향을 키우는 사람들. 그대들의 이름은 자랑스러운 내향인.  


덧. 글을 쓰다가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 소중하고 좋은 것을 지속하는 비결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것 같은 내 일상이 버무려진 글 앞에서 함께 웃고 울어준 이들이 없었다면 몇 년 간의 공개 글 써보기는 극 인프피인 나에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혼자서도 잘하는 내향인이여. 이제 가꾼 정원을 나눌 시간이다. 이 정원 오픈이야말로 내향인의 이중생활이 흥미진진해지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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