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 정신이 필요하다.
뚜오샤오치엔? (多少钱,얼마예요?)
어설픈 중국어로 가격을 물어본다. 재래시장 과일 가게 주인이 내 얼굴을 슬쩍 쳐다본다.
"80위안요"
내가 아는 가격의 두 배다. 나의 어색한 보통화 발음이 들통났군. '나도 중국에 수년 째 살고 있는데 나를 너무 무시하네' 생각한다. 가격 정찰제를 하는 옆 집 대형마트로 발걸음을 옮긴다.
띠띠와 타오바오
중국의 인터넷 발전에 따라 외국인으로서 살기 편해진 것이 몇 있다. 띠띠추싱과 타오바오가 대표적이다. 이전 택시를 타려면 안 되는 중국어로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도 답답하고, 기사가 빙빙 돌아가도 제대로 항의하지 못하는 등 곤란했다. 그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내릴 때 미터기와 상관없이 웃돈을 요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처음으로 북경 출장을 갔을 때 총무과 현지직원은 "미터기로 가주세요"라는 중국말을 여러 번 강조하며 나에게 가르쳤다.
이제 옛날 얘기다. 지금은 다들 디디추싱, 또는 다른 택시 앱을 이용하여 택시를 부른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디디추싱이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했는데 중국 정부 '괘씸죄'에 걸려 앱스토어에서 다운로드가 금지되는 바람에 여러 소규모 경쟁업체들이 생겨난 상황이다. (지금은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고 한다) 택시 앱을 이용하니 목적지를 설명할 일도, 길을 돌아갈까 걱정할 일도(내 전화기로 내비게이션대로 가는지 확인할 수 있다. 고의로 멀리 돌아가면 택시 기사에서 벌점을 주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택시비로 논쟁할 일도 사라졌다.
쇼핑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에서 가격 싸움을 할 필요 없이 핸드폰 버튼을 몇 번 눌러 필요한 물건을 주문한다. 물류비도 많이 비싸지 않고 출발지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보통 수 일내로 도착한다. 타오바오는 가장 보편적인 인터넷 상거래 플랫폼이지만 가짜 브랜드 제품이 많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징동京东에 가면 가격은 더 비싸지만 일단 정품이고, 배송도 빨라(빠르면 당일, 보통 다음 날, 늦으면 다다음 날) 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
협상
모든 물건이 이렇게 투명하게 거래되지는 않는다. 비즈니스를 하다 보면 가격 협상을 해야 할 일이 종종 있다. 중국 사람들은 타고난 협상가이다. 돈이 걸려있다면 절대 양보하지 않는 DNA를 가지고 있다.
작년 투자 합작 프로젝트에 대한 중국 파트너사와 협상을 한 적이 있다. 상대방은 우리가 생각한 가격의 딱 2.5배를 불렀다. 회사 경영진은 실망했다. 저녁 회식 때 가격 이야기를 몇 번 더 꺼냈지만 상대방은 양보 의사가 없는 듯했다. 우리는 급했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그날 우리 회사를 방문한 실무진들은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자가 아니었다. 회식 자리에서 그 가격을 고수할 수뿐이 없었다. 나는 이후 협상할 여지가 남아있다 생각했다. 상호 이득이 된다면 상대방도 얼마든지 조건을 조정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아니 일단 처음이니 높은 가격을 불러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경영진은 추가 협상 의지를 잃었고 딜은 흐지부지 취소되었다.
Anchoring Effect
행동경제학 용어로 닻을 내린 배가 닻줄 범위를 벗어날 수 없듯이, 협상 시 최초 언급된 조건에 영향을 받아 그 조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결국 누가 먼저 조건을 제시하느냐, 얼마나 과장된 조건을 제시하느냐가 중요하다.
예전 소파를 구매할까 백화점에 들어본 경우가 있다. 5층 가전 코너로 올라가자 에스컬레이터가 끝나는 지점에 호화스러워 보이는 소파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백화점에 오기를 잘했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있는 가격표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1,500만 원짜리 소파라. 나의 예산 범위를 넘어도 너무 넘어서는 가격이었다.
이후 경제학 책을 읽으며 이것도 백화점 설계자의 고도의 심리 수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에 일부러 비싼 물건을 전시하여 '아, 이곳 평균 가격이 이렇구나' 생각하게 한다는 것이다. 1,500만 원이라는 닻이 마음속에 내리면 이제 800만 원짜리 소파를 보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싸구나 생각하게 된다.
철면피
말은 쉽고 실행은 어렵다. 말도 안 되는 가격을 내 입으로 얘기하기가 참 민망하다. 한국 마트에 가서 큰 수박을 보고 "이거 5천 원에 주세요"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중국에서 협상을 하려면 이런 철면피 정신이 필요하다.
변호사 자문료
최근 법무자문 건 변호사 수임료에 대해 로펌과 협상한 적이 있다. 관련 사례가 별로 없는 건이라 가격 책정이 어려웠다. 낮에는 자문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민감한 가격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삼갔다. 멀리서 이 건을 위해 출장 오신 분이라 어차피 우리가 저녁을 대접해야 했다. 저녁 시내 호텔 중식당에서 전채 요리가 나오고 술 몇 잔 오고 간 후 로펌 변호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건은 사례가 적고, 난이도가 높은 건이라 쟁점 금액의 9% 자문료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선수를 쳤다. '아뿔싸'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생각하는 가격의 네 배 이상이었다. 변호사는 가격이라는 닻을 지구 반대편에 던졌다. 방심하는 사이 선빵 당했다. 너무 높은 가격을 불러 우리 제안을 말하기가 민감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연습한 멘트를 날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저희가 생각하는 바와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쩌죠? 저희는 1%가 적정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하고 나니 앞의 말을 괜히 했나 후회가 살짝 들었다. 우리 의견을 약화시키는 말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예의산 붙인 말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살짝 안도감이 들었다.
"변호사 사회에 적정 수임료란 개념이 있는데 너무 낮은 가격에 수임을 할 경우에는.."
변호사는 장황하게 로펌 자문 시장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건 너네 사정이고' 생각이 들었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에서 너무 노골적인 반박은 삼가는 게 좋다. 일단 상대방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는 "서로 생각하는 차이가 크지만 앞으로 계속 논의해 보자"며 대략 마무리 한다.
회식은 서로 간의 입장을 확인하는 수준에서 끝났다. 이후 몇 번의 논의를 통해 자문료는 2% 초반대로 결정되었다. 우리가 처음 목표로 했던 범위 상한선에 근접했다. 서비스 결과가 중요한 상황이라 무조건 깎는 게 능사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회식 시 1%가 왜 적당한지 우리도 장황하게 설명을 했어야 하나 생각했다.
철면피 연습이 아직 더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