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책이 가득한 곳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종이 냄새인지 잉크 냄새인지 ‘책 냄새’가 있다. 한두 권은 코를 대고 킁킁 맡아봐야 미세하게 느껴지는데 책방이나 도서관처럼 책이 빼곡한 곳에선 한꺼번에 훅 맡아진다. 매번 그 냄새에 매료돼 카페에 가면 커피를 사 들고 나오듯 책방에 가면 꼭 책 한 권을 들고 나온다. 읽지도 않은 책이 저렇게나 많은데 뭔 책을 또 사들고 왔냐는 엄마의 째림에도 당당하게 맞선다. 읽으려고 샀다고, 책이란 본디 읽히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인데 당연히 읽는 데 쓰지 뭣에 쓰겠냐고!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책방엔 새 책들이 가득하다. 하루에 출간되는 새 책은 몇 권쯤 될까? 분명한 건 내가 책을 읽어내는 속도보다 출간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거다.
새 책을 마주하면 가장 먼저 표지가 눈길을 끈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의 전면에서 가장 넓은 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표지는 마땅히 그럴 자격이 있다. 예전엔 책이란, 읽혔을 때 감동을 선사한다고 여겨졌지만 최근엔 겉모양 새, 특히 색감이 예뻐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외적으로도 감동을 준다. 시각적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면 나만 해도 무채색 표지의 책에 눈길이 2초 머문다면 감성 돋는 파스텔 계열, 특히 광택감이 살아 있는 실키 파스텔에는 5초쯤 머문다.
이는 아마도 작은 것이라도 감성 내음이 있어야 관심을 갖는 요즘 독자들의 취향을 따른 출판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자 매일 새로 탄생하는 책들 사이에서 먼저 눈에 띄려는 생존법일 테지만, 적당하면 좋을 것을……. 같은 색도 농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데 죄다 연분홍, 연보라, 연초록 일색이니 은근한 소름이 돋게 징그럽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하얀 바탕에 거무죽죽한 수영장을 그린 것으로 특유의 서늘한 분위기를 살린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 표지에 요즘 대세를 따른다고 솜사탕 색깔 같은 연한 하늘색 바탕에 야리야리한 일러스트 느낌의 수영장 그림이 그려져 있다면 독자들은 과연 <종의 기원>을 어떤 책이라고 상상할까?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고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지만, 읽기 전에 봤던 표지의 느낌과 읽은 후에 본 표지의 느낌이 확연히 다르다. 괜히 센터에 자리에 표지를 세워준 게 아니다. 표지는 책 내용을 꾹꾹 눌러 만든 농축액 같은 존재다. 독서 후에 전면의 표지를 보면 아하! 하며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완독 한 사람만이 표지에 숨겨진 비밀을 온전히 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독서가 주는 또 하나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점점 획일화되어 가는 표지들을 볼 때마다 가격은 같은데 양은 줄어든 음식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한다.
일단 눈길이 가면 빠르게 제목을, 동시에 작가를 확인한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작가다. 정확하게는 나와 결이 맞는 작가의 작품이다. 사람 사이에 은근한 궁합이 있듯 작가와 독자, 작품과 독자 사이에도 궁합이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어도 읽는 내내 돌림노래처럼 같은 자리만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한 장을 넘기기가 어려운 책이 있다. 반면 인지도가 낮은 작가의 작품이어도 유난히 진흙 속에 묻혀있는 진주 같은 책이 있다. 이것이 충족되면 두 번 고민하지 않고 집어 든다. 과감하게 앞으로 읽을 책 목록에 끼워준다.
가끔 돈 쓰고 싶어 죽겠을 때가 있다. 길 가다 눈에 띈 빨강 하트가 뿅뿅 박힌 양말을 사고, 구입 가능한 시간을 정해서 한정 수량만 판매하는 유명한 떡볶이 밀키트 몇 봉지와 모 연예인이 하루 한 알이면 몸속 지방이 분해될 수도 있다고 광고하는 다이어트 보조제 세 달치를 주문한다. 평소 즐겨 신는 양말 색은 검은색이면서 하트가 웬 말이고, 먹거리를 잔뜩 쟁여놓고 다이어트 보조제라니……. 이 시기의 소비 패턴엔 일관성이 없다. 뭐라도 사고 싶어서 안달 난 찰나에 눈에 띈 뭐라도 사재 끼는 거다.
그래도 책은… 다르다. 욱해서 지르는 저것들과는 결이 다르다. 책은 여느 때 보다 신중하게,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소비한다.
주로 사 모으는 분야는 장르물을 포함한 소설류다. 간혹 책장에 에세이를 들여놓긴 하지만 십중팔구는 소설이다. 책은 소설을 편독하면서 글은 에세이를 쓴다. 몇 번 소설 쓰기를 시도해 봤지만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내용을 있는 대로 부풀려버려서 헬륨가스로 채워진 풍선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다. 소설을 못 쓰니까, 그래서 소설을 읽는다. 다른 사람이 쓴 정돈된 소설을 읽으며 소설을 향한 갈증을 만족시킨다.
어릴 적 집에 어린이 세계 전집을 들여놓고 싶어 하던 엄마와 달리 나는 줄기차게 책을 멀리했다. 책의 종류라곤 교과서를 들춰보는 게 전부였을 정도다. 그랬던 내가 책을 열망하게 된 데에 별다른 계기가 있던 건 아니다. 어쩌다 심심해서 한 번 들춰본 소설책이 꽤 마음에 들었고, 비슷한 장르의 소설책을 한 권 더 읽고, 또 한 권 더 읽고, 또 한 권 더 읽은 것이 이렇게 됐다.
맞다. 나에게 책은 소비의 대상이 맞다. 습관적인 소비인 셈이다. 책을 보면 책을 갖고 싶다. 엄밀히 따지면 책을 사는 것이 책을 읽는 것과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김영하 작가는 말했다. 책을 사야 그 책들 중에 읽는 거라고.
눈독 들인 책을 사드는 순간, 다른 것들에서 느끼지 못하는 뿌듯함이 있다. 아기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탕을 맛본 황홀함처럼 기분이 둥실둥실 떠오른다. 어찌 보면 책이란, 한 데 엮은 종이 뭉치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품에 안으면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사람을 끌어안은 기분이 든다. 때론 지구 반대편 세상, 때론 2,000년 후의 세상, 때론 평생 마주칠 리 없던 사람, 때론 누군가의 마음속.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사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