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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Mar 20. 2020

열여섯 번째 산맥

17. 대구

싱가포르


근 5년 만의 첫 한국 나들이었다. 9월 이십 며칠의 가을날, 금요일 오후에 한국 행 비행기를 탔다. 지갑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난 경유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왕복 항공권이 한국 돈으로 고작 칠십만 원을 웃돌았던 것 같다. 내가 탄 항공은 싱가포르 항공. 경유지는 싱가포르.


시드니에서 싱가포르까지는 대략 6시간이 소요됐고, 3시간가량을 공항에서 머무른 후 7시간을 다시 날아가는 일정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적기를 제외한 나머지 항공들에 대한 불신이 뿌리 깊은 상태였는데, 싱가포르 항공은 아주 커다란 만족을 안겨주었다. 기내식도 맛있었고 의자와 의자 사이의 공간도 넓었으며 사뿐한 비행상태까지! 역시 아시아의 부호, 싱가포르다웠다.


경유지인 싱가포르에 내리자마자 몹시 습했다. 에어컨이 틀어져있는 공항 내부가 이렇다니, 얼마 전 겪은 필리핀 여행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몸서리가 쳐졌다. 아무튼간 인천 공항만큼 크고 깨끗한 창이공항에서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조금 출출하던 차에 도톰한 버터가 올라간 카야 토스트를 사 먹어 보았는데, 토스트는 파삭파삭했고 카야잼은 고소하고 달콤했다. 꿀처럼 맛있었다.


게이트 근처의 기념품 가게에서 육포 한봉을 사서 공항 마사지 기계에 내 몸을 맡기고 독서를 하다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운이 좋게도 맨 앞자리여서 다리를 쭉 뻗어 거의 눕다시피 왔다. (완벽한 여행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에 도착해서는 유심칩을 갈아 끼우고 예매해 둔 새벽의 우등버스에 간당간당하게 시간 맞춰 몸을 내던졌다. 버스에 누워 네다섯 시간을 깊게 잠이 들었다. 피로가 싹 가셔 눈을 뜨니 어느새 새파란 해가 떠오르고 있었고, 나는 대구였다!




나의, 못 견디게 사랑스러운!



나의 고향은 대구, 하지만 성남에서 이십 년을 넘게 산 나는 경기도민이다. 아니, 호주 가기 전 까진 그랬었다. 재수 끝에 동생 메린은 대구의 어느 대학교에 입학 했고 부모님의 본래 고향 또한 대구였기에, 나 김지윤이 호주로 떠난 즉시 가족 전부 아랫지방으로 터를 옮겼더랬다.


어렸을 적 몇 번 친척집 방문을 위해 명절 날 놀러 와 본 기억 말곤 별 다른 추억이 없는 곳이기에, 대구란 다소 낯선 곳이다. 그렇지만 2017년의 가을여행을 기점으로 이 미지의 도시는, 종종 어렵고 때때로 익숙한 너무나 사랑스러운 나의 최애 도시로 등극해버렸지 말이다.


9월 말은 가을이 아니던가! 내 캐리어에는 트렌치코트와, 각종 가을용 자켓, 긴팔 긴바지가 담겨있었다. 그러나 9월의 대프리카는 그냥, 그냥 한 여름이었다. 내가 대구를 너무 얕본 거겠지. 그렇게 도착 즉시 엄마의 반팔과 반바지를 빌려 입고서 얇은 옷 몇 벌을 먼저 구매했다.


그렇게나 덥고 뜨거웠던 대구에서의 나날들은 정말이지! 아주 즐거웠다! 날 너무 예뻐해 주는 사랑하는 이모들, 매일을 그리워했던 가족들! 나는 이들과 함께 '앞 산'에 있는 멕시코 음식점에도 갔고, (어쩐지 맛은 한국 음식의 맛이었지만), 동성로 맛집에서 혼밥 하기, 가고 싶었던 카페들을 속속들이 섭렵하기 등 하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했다. 그리고 또 교보문고에도 갔는데, 어린 날의 기억 속에서는 그렇게나 미로 같았던 곳이 지금 보니 그리 크지 않은 '동네 서점'이었다니 의외였고 조금 섭섭했다. 내 경험의 크기만큼 작아져버린 곳들이 이제는 마냥 아쉽기만 하다.





아 참, '대구'하면 이 곳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 바로바로 집 앞 서남 시장. 아주 크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시장 규모에 나는 정신이 홀딱 팔렸다. 이 곳이야말로 진정한 미로라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으로 나가면 인생 최고의 붕어빵 가게가 나오고 어느 쪽으로 향하면 질 좋은 양말을 100여 가지의 종류로 파는 가게가 나오고, 그 양말가게 건너편에는 고든 램지도 울고 갈 칼국수집 좌판대가 죽 늘어져있다.


지금도 머릿속에는 그 날, 그 곳, 그 냄새까지 선명히 떠오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하루가 내내 벅찬 날이면, 가만히 앉아 기억들을 더듬는다.

어둠 속을 헤집어 따끈한 기억을 찾아내고 나면 나는  오늘 루 쯤은 무리없이 버텨낼 힘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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