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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urney kim Apr 20. 2020

스물다섯 번째 산맥

26. 유니 유니 윤윤

친구가 왔다.


그로부터 몇주 후, 한국에서 세명의 친구가 날아왔다. 그 셋으로 말할 것 같으면 둘은 고등학교 친구로, 정미미 그리고 유니. 나머지 하나는 유니의 아들 되시겠다. 이 네 살배기 녀석을 일주일 넘게 맡아줄 곳이 없었기에 유니는 아이와 함께 올 수밖에 없었다. 애 아빠가 보면 되지 않느냐,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아쉽게도 그는 바람을 피우다 들켜 이혼당했다. 세상에는 왜 이리 바람피우는 남자가 많은 건지 얼마 전 본 드라마에서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존재해. 바람피우는 남자와 그걸 들키는 남자."


고통받을 가족들과 평생을 그 상처 안에서 살아가야 할 자식새끼를 조금이나마 생각한다면 그 욕구조차 참지 못하는 그게, 그런 '것'을 과연 '인간'이라고 정의 내려도 될까.


아무튼 친구들의 숙소를 찾아보던 중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바로 두 층수 위, 에어비앤비에 올라온 집이 있었다. 운 좋게도 친구들이 오는 일주일간은 예약되지 않아 있어서 바로 입금을 했고, 지금부터 그곳에서의 일주일이 시작된다. 자 집중하시라.




정미미는 수년 전 이미 시드니에 놀러 와 한 달가량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유니와 그의 네 살배기 아들은 호주 첫 방문이었다. 세명 다 '유명한 관광지'에 대한 욕망은 없었기에 나는 주로 시티와, 시티 근방의 분위기 좋은 곳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널널이 계획을 짰다.




숙소에 들어와 짐을 풀고 간단히 정리한 후 슬슬 걸어 나갔다. 숙소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바로 IKEA 가 나오는데  가는 도중에 강을 보며 식사할 수 있는 작은 카페가 있다. 우리는 그곳에서 커피 세 잔과 감자튀김을 시켜 먹고 산책로를 걸었다. 언제나 혼자 걷던 이 길을 내가 가장 아끼는 친구들과 함께 걸으니 기분이 묘했다. 길이 언제고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IKEA 건물에는 에스컬레이터를 가로지르는 놀이시설이 있다. 건물에 들어간 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유니의 아들내미가 그 놀이시설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IKEA고 나발이고 간에 본인은 그걸 타야 한다고 오만 생떼를 다 부리고 있었다. 결국 지친 어미는 너네들끼리 구경하고 와...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고 미미와 난 쇼핑센터를 돌며 시간을 보냈다.




여유 있는 일정이었지만 말 안 듣는 미운 네 살을 끼고 온 유니에게는 그것조차 힘들었을 테다. 예를 들자면 꼬맹이의 하루는 놀이시설로 시작됐다. 어딜 가기 전에 무조건 그곳에 가서 30분가량을 놀고 나와야 했고, 시티에서는 갑작스레 잠이 들어버려 유니는 이십 킬로의 아들을 등에 업고 언덕길을 오르기도 했다. 그 당시는 보는 우리마저 지치고 힘들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런 유니가 귀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면서 또 웃기기도 하고.



유니와의 역사


유니와의 만남은 고등학교 2학년, 같은 반에 배정되며 처음 만났다. 당시 나는 정미미와 함께 이미 미술부원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단 둘이 붙어 다녔다. 초 여름의 어느 날, 미미와 난 급식 메뉴가 맘에 안들어 매점에서 때우자고 이야기하던 중 멀찍이 서있던 유니가 다가왔다. 자기도 급식 먹기 싫으니 함께 점심을 먹자는 의도였다. 그 당시, 유니의 무리들과 쉽게 섞이지 못했던 나는 껄쩍지근한 웃음을 지으며 오케이 했다. 유니는, 새침데기의 얼굴을 한 그녀는 알고보니 굉장한 수다쟁이었고 기대 이상으로 바보였다. 은근슬쩍 놀려먹어도 좋다고 웃어대던 그녀에게 미미와 나는 빠져들고만다.


그렇게 몇 번의 점심 식사자리가 이어진 후 우리 셋은 단짝 친구가 되었다. 때로는 유니의 무리들과 함께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몸개그 파였고 나는 입을 터는 쪽이었기 때문에 어울리기는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을 함께 보낸 유니와 나와 미미는 곳곳의 대학교로 진학을 했고 그렇게 그녀들은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울메이트가 되어있었다.


유니의 엄마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편이다. 엄마는 차도 있고 아파트도 있고 가게도 있으시다. 그런 엄마 품에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유니가 때로는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고충에 공감할 수 없는 날도 많았다. 때론 그녀의 투덜거림을 바보 같다고 치부한 날도 있다. 이렇게나 한심한 나 자신이다.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녀에게 이혼이라는 상처와, 언제나 엄마를 이겨내지 못하는 그녀의 상황을 흐린 눈을 뜨고서 바라봤던 나다. 그저 '경제적으로 나보다 나은 환경'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고충을 바보 같다고, 배부른 소리라고 생각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이가 없다. 네가 뭐라고.





그런 내가 뭐라고 유니는 한국에서 아들내미까지 데리고 날보러 왔다. 비행기를 타고 돌아갈 땐, 아무도 없는 타지에 날 놓고 가야 한단 마음에 눈물까지 펑펑 흘렸더랬다. (엄마도 안 울던걸.) 유니는 2020년 사월 며칠날 수년동안 질질 끌던 엄마 자본의 가게에서 해방되었다. 창창히 펼쳐진 그녀의 앞날, 그 첫 발걸음을 축복하며 유니 내 소중한 친구가 한 평생 외로움 따위 느끼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정말 정말 소중한 내 친구 유니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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