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세상의 모든 일은 두 가지로 나뉜다고 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그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평온을 비는 기도’가 생각난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주시고,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를 주시며,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 둘을 구별할 수 있는 적당한 지혜가 있다면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암 치료를 시작하고, 지난 2주 동안 처음으로 기분이 몹시 우울했다. 약들의 부작용으로 기분에 업다운이 있을 수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두 달이 되어가는 지난 치료 기간 동안 기분이 특별히 다운되거나 많이 우울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올 것이 왔다.
이유는 부작용 때문이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 중 하나로 올 수 있는 문페이스 moon face 라고 하는 얼굴이 붓는 현상이 생겼는데, 갑자기 붓기 시작한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빵빵해져서 정말 달덩이처럼 되어버린 것이었다. 물론 그 동안도 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비해서는 얼굴이 대체로 부어있기는 했지만, 2주 전 얼굴이 무섭도록 본격적으로 붓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붓기 시작한 얼굴은 수요일에 정점을 찍었는데, 거울 속의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전체적으로 복스럽게(?) 통통 부은 게 아니고 알러지가 올라온 것 처럼 입술과 눈가가 제멋대로 빵빵하게 부었는데, 특히 윗 입술이 너무 붓고 주변 피부가 굳어서 입을 열어 말을 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보통 문페이스는 얼굴이 붓기만 하는데, 나는 얼굴 전체가 빨개지고 열이 나고 따갑고 얼굴 표면에 딱지가 앉은 듯 두꺼워진 거라 검색해보니 내가 먹고 있는 스테로이드 뿐 아니라 항생제와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이전에 풀도즈를 처음 맞고 CRS가 왔을 때도 이만큼 힘들지는 않았다. 물론 몸은 꽤 힘들었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프로토콜이 있었고 나는 그대로 행하면 됐었다. 내 발을 움직여 응급실로 가면 됐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 마음대로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얼굴이 따갑고 당기고 아프긴 했지만 응급실행을 할 만큼 심각하게 아픈 것은 아니었고, 그저 내 마음이 너무 속상한 게 제일 문제였다. 내가 내 얼굴을 보는 일이 이렇게 힘들 일인가.
어쨌든 정상은 아닌 건 확실했으니 나는 얼굴 사진을 찍어 Jo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다음날인 목요일이 병원 가는 날이었지만, 다음 날 내 얼굴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게다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Tom이 아닌 다른 의사가 나를 보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어 있어서 더욱더 기록을 남겨 놓아야 할 것 같았다. Jo는 내일 내가 만날 의사인 Georgia와 상의해 보자고 답장을 보내왔다.
다음날인 목요일, 불행인지 다행인지 병원에 갈 때에도 얼굴은 한껏 부어 있었기에 설명하기는 오히려 쉬웠다. 처음 만난 Georgia는 펠로우 단계에 있는 젊은 여의사였는데, Tom등 의사들이 너무 바빠져서 앞으로는 임상 실험 중에 있는 모든 환자를 Georgia가 전담한다고 했다. Tom에게 익숙하긴 했지만, 더 여유로운 진찰 면에서는 오히려 나을 수도 있겠다 싶었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이미 병원 사정에 맞추어 정해진 걸로 보여서,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을 선택했달까. 물론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 Tom을 만날 수 있다고는 했다.
나는 문페이스의 원인이자 그 동안 나에게 이런저런 부작용을 많이 안겨준 덱사메타존을 끊으면 어떨까 싶었는데, Georgia의 생각은 달랐다. 내 얼굴이 이렇게 된 원인이 항생제인 코트리목사졸 co-trimoxazole탓인 것 같다며 이 항생제를 끊어보자고 했다. 코트리목사졸은 처음 먹을 때부터 피부 트러블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고 주의를 들었던 폐렴 및 각종 염증 예방 약이다. 덱사메타존 때문에 문페이스가 생긴 것이면 그냥 붓기만 해야 하는데 다른 피부 증상들이 있으니 일단 코트리목사졸을 끊고 지켜보기로 했다. Georgia는 얼굴에 바를 수 있는 스테로이드 연고도 처방해 주며 원하면 사용해 보라고 했다. 두어 번 발라 보니 햇빛에 홀랑 탄 것처럼 얼굴 피부가 허물 벗듯 얇게 다 벗겨져버려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트리목사졸과의 관련성을 정확히 확인하고 싶기도 해서 연고는 그냥 치워버렸다.
어쩌면 엡코리타맙의 부작용인지도 몰랐다. 화요일부터 온 몸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는데 이건 보통 엡코리타맙의 부작용이다. 그 동안은 이렇게 두드러기가 생긴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왜? 무엇이 원인인지 정확히 모르니 더 답답하고 기분이 다운되었다.
그 와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작 얼굴이 붓고 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걸로도 마음이 이렇게 힘든데, 센 항암을 하는 분들은 얼마나 힘들까. 퉁퉁 부은 얼굴을 보는 게 힘들어서 거울 앞에 잘 안 서게 되는데, 만약 내가 표준 항암을 해서 머리라도 밀어야 했으면 어땠을까. 나는 내 마음을 온전히 지킬 수 있었을까?
며칠 전, 가끔 찾아 보는 돌돌콩님의 유튜브에서 type 2 fun 이라는 개념을 주워들었다. 경험이 인생에 무엇을 남기냐에 따라 즐거움의 스케일을 3 가지로 나눈 것인데, type 1 fun은 편안하고 좋은 경험으로 하는 순간에도 즐겁고 끝나고 나서의 기억도 좋은 경험들, 예를 들어 가족과의 시간이나 취미활동 같은 것이다. Type 2 fun 은 성장형 경험으로 하는 동안은 힘들고 불편하지만 끝나고 나면 성취감이 남고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도 좋은 경험으로, 힘든 공부나 일, 육아 등등이 포함된다. Type 3 fun은 소모적인 경험으로 할 때도 힘들고 끝나고 나서도 좋은 기억은 없는 경험, 예를 들어 관계의 스트레스라든가 잘못된 선택 등등이 있겠다.
암을 겪고 이겨내는 경험이 나에게 type 2 fun일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 당장은 여러모로 몸도 마음도 불편하지만 나중에 다 낫고 나서 돌이켜 보았을 때 나를 한 뼘 성장시키는 좋은 인생 경험으로 내 마음속에서 분류될 수 있기를.
사실 벌써 그렇다는 것을 진작에 알고 있었다. 진단을 받고 치료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그 동안은 몰랐던,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생각들과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고 그것에 참 감사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 마음대로 내 몸과 마음이 안 되는 시기를 겪고 나니 확실히 내가 환자는 환자구나, 이게 참 보통 일이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건강한 일반인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고, 나보다 더 고통스럽게 투병하고 있는 분들과 비교할 필요도 없다. 그냥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내가 겪고 있는 분량의 힘듦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버텨야겠다. 다 지나간다.
이 시기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거야말로 복이지 싶다. 오늘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다리와 입꼬리를 억지로 움직여 운동을 나가고 무리해서 즐거우려고 하는 대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야겠다. 우선 따뜻한 루이보스 차를 마시고, 컬러링을 한 페이지 끝내고, 책과 음악과 영상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내 마음에 꽂히는 것에 편하게 내 시간과 마음을 흘려 보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