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여름 Feb 24. 2024

너를 잊지 못하는 까닭은

미신을 맹신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인생의 큰 변곡점에 서 있을 때마다 눈이나 비가 내렸다. 그래서 결정을 목전에 둔 날 눈비가 내리면 인생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징조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전조가 처음 나타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의 초입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이 화가였던 나는, 그림에 일말의 재능도 보이지 않던 짝꿍이 갑자기 미술학원을 다니자 질투심이 솟았다.

“쟤보다 내가 훨씬 더 잘 그리는데, 나는 왜 못해?” 예술인은 가난하다고 반대했던 부모님이었지만 단식투쟁을 하며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던 딸의 결의에 어머니는 백기를 들었다. 결국 우리는 택시를 타고 명덕네거리의 대형 미술학원으로 향했다. 태풍이 몰아치던 날이었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으나 엄청난 비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던 날씨였다.

“니 꼭 오늘 가야겠나? 다음에 가면 안 되겠나?” 어머니는 조심스레 물었지만 나의 결심은 단호했다. 오늘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 '어떻게 돌린 엄마의 마음인데' 종잇장 뒤집듯 쉬이 바뀌는 것이 사람의 마음 아니던가? 미술학원을 향하는 사이 엄마의 마음이 바뀌지 않기만을 바라며 모진 비바람을 뚫었다. 짧은 상담 후 수업을 등록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열정적이었던 한 시기를 보냈다. 지방대였지만 장학금을 받고 시각디자인과에 합격을 했다. 그 후 디자인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서 일을 하며 7여 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서울에 UX디자인을 배우러 갔을 때나 공무원 시험을 치르던 날도 비가 왔다. 3년 반을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졌을 때도 그랬다.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하늘이 언질을 주었다. 성진을 만났던 날에도 함박눈이 쏟아졌다. 커다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져 유난히 예뻤던 화이트 크리스마스이브였다. 영화 같은 풍경 속에서 우리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걸었다.


꿈속에서도 누군가와 함께 눈이 오는 골목길을 걸었었다. 오래된 꿈이었으나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나는 그 꿈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다. 정확한 얼굴이 기억나진 않지만 키가 크지 않았고 아주 잘생기진 않은 얼굴에 반곱슬머리. 그리고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원통형의 식탁이 있던 식당에서 빠져나와 눈 오는 골목길을 함께 걸었다. 어느 순간 장면이 전환되고 그는 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거냐며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기도 하고 S가 들어가는 어느 가게에서 다시 꼭 만나자고 당부했다. 꿈에서 깨었는데 너무 생생해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가 나의 인연임을 직감했다. 누가 들으면 코웃음을 칠 일이지만 나에게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눈 속에서 성진을 보았을 때, 혹시 꿈속에서 본 그 사람이 성진일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중간 정도의 키와 부드러운 느낌, 눈이 오는 길거리의 모습이 합쳐져 혹시 모를 기대가 생겼다. '나는 너를 알아봤으니 이제 너만 나를 알아보면 돼.'라는 마음도 있었다. 성진을 좋아했던 거의 모든 이유는 나와 생각이 닮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꿈이나 눈 같은 말도 안 되는 육감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이 더 깊어지기도 했다. 나는 운명론자이니까.


운명이라 믿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던 것인지, 애석하게도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성진은 나와 사귀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과 상관없이, 나는 차가운 그의 손을 잡고 무슨 이야기든 하며 함께 걷고 싶다. 어쩌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때마다 그가 생각 날 것이다. 잊어야  한다는 생각이 잊지 못하는 마음에 지기만 하는 까닭은 눈 때문이다. 꿈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유독 예쁘게 내렸던 그날의 눈 때문이라고, 꿈에서 보았던 그 남자 때문이라고 우기고만 싶다.


대구에는 눈이 자주 내리지 않는다. 진눈깨비 같은 눈만 흩날렸다 금방 녹아서 다행이다. 며칠 내내 내리는 비 때문에 그에 대한  기억이 소란을 떨지만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따뜻한 계절이 모든 눈을 다 녹이면 그도 내 마음속에서 없어질 것이다.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로맨스는 우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