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된 지 몇 해가 되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 진부한 클리셰와 절절한 대사는 정말이지 우웩이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보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지점에 이르렀다. 40세가 다 되어가는 나이에도 드라마 속에서 심장이 쿵 떨어질 만한 키스 직전의 분위기가 조성되면 괜히 머쓱해진다. 두 눈은 화면을 향해 있으면서도 공연히 옆에 앉은 엄마의 숨소리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 그럴 땐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친다.
“아 겁나 답답하게 구네, 주댕이를 칵 받아버려!” 몰입하고 있는 엄마의 산통을 확 깨버린 뒤에야 마음이 편안하다.
순정 만화를 좋아하고 여자에게 헌신하는 남자를 보며 정말 근사하다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언제부터 냉소가 가득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분명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도 아주 지긋지긋하게 연애를 해서 '더 이상 연애 따위는 그만해도 되겠다.'라고 염불을 외고 다녔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는 티브이 속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별별 인간들을 만나면서 깨달았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손가락이 맞닿아 사랑에 빠지는 우연도 없고 내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는 잘생긴 동아리 선배도 없다. (있다고 해도 그가 게이일 확률이 팔 할이다.) 계단에서 휘청거리면 사람들은 허리춤을 잡아줄 태세를 취하기보다 뒤통수가 깨지기 좋게 모세의 기적처럼 길을 열어준다.
실상은 말라 붙은 기름때처럼 찝찝하고 끈적할 뿐이다. 우리는 좀 더 동물적이거나 세속적으로 만난다. 술집에서 몇 번 눈을 맞췄다고 번호를 얻고 너저분한 농담을 던지며 상대의 마음을 떠본다. 티브이 한 장면에 담기지도 못할 별 시답지 않은 사람과 시시한 이야기를 하며 박수를 치고 깔깔거린다. 으, 그때의 나는 왜 그랬을까? 우리 모두는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엑스트라 1, 2에게나 어울리는 연애를 한다. 시간이 지나서 아름다웠다고 미화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의 연애는 그렇게까지 로맨틱하지가 않다.
하지만 나는 ‘우당탕탕 조연의 에피소드’류를 더 좋아한다. 날것의 사랑. 아니 사랑을 가장한 멍청한 짓을 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사가 하나씩은 빠진 친구들이 비슷하게, 혹은 훨씬 더 심하게 얼빠진 놈들을 만나 엉망진창인 무언가를 만들었다 부수는 그런 요사스러운 짓들을 한 이야기 말이다. 필시 이불을 뻥뻥 찰 만한 수치스러운 이야기는 아드레날린을 폭발시킨다. 성숙함은 애초에 팽개치고 술에 취해 눈물 쏟으며 ‘또라이 새끼, 개 같이 망해버려라!’ 소리치는 장르가 훨씬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오늘도 내 친구는 이혼서류를 접수할까 고민하다가 며칠만 더 참아줘 보기로 했다고 한다. 스스로가 망가지는 것을 알면서도 쓰레기 같은 남편 놈을 위해서 견딜 수 있을 만큼 견뎌보려는 자학 행위와 어떤 미련함!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들은 우리의 찌질하고 어리석은 선택들이다.
현실과 티브이 속 모습의 간극은 너무 크다. 멍청하고 답답하고 엉망진창인 연애. 우리의 연애는 찰나의 순간 로맨스였다가 대부분이 시트콤으로 흘러간다. 개과천선하는 남자 주인공은 없고 폐기물은 끝까지 재활용 불가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시트콤에는 새드 엔딩이 어울리지가 않는다. 우리는 얼마간 무너졌다 일어나 매립지에 흙을 채운 뒤, 두 발로 다져 밟고 일어날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띠드버거'를 외치는 황정음처럼, '야동 순재'라는 불명예를 얻어도 뻔뻔하게 큰소리치며 살아가는 시트콤의 주인공처럼 당차게 살아갈 것이다. 내 남은 인생에 얼마나 웃픈 스토리가 전개될지, 그 속에서 얼마나 울고 웃을지 걱정과 기대가 한 몸으로 섞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