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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Nov 29. 2020

술고래 도깨비 1

서촌 막걸리

그건 날씨 좋은 날의 해수욕이야. 이리저리 물장구를 치는 거야. 그러다 깊은 곳에 이르면 숨을 참고 잠수를 하는 거지. 그렇게 한 번, 두 번. 바다에 서서히 익숙해지자 나는 알게 됐어. 숨을 참는 것은 바다라는 새로운 대기를 들이키는 방법인 걸. 나는 하늘을 베고 누워 바다를 응시했어. 서서히. 천천히. 그렇게 마지막 숨에 다다랐을 때. 순간 눈은 맑아지고 귀는 먹먹해졌지. 그때부터야. 바다는 나의 새로운 세계가 되었어. 볼에는 아가미가 돋고 손에선 갈퀴가 자랐어. 나는 자연스럽게 바다를 거닐게 됐지. 마치 전에 하던 산책 같았어. 깨끗한 바닷물을 신선한 공기처럼 들이키고, 밀려오는 파도는 시원한 바람으로 마주했어. 그리고 한참 후에 발견한 거야. 나의 산호초. 형형색색의 산호초에 나는 바로 황홀해졌어. 산호초는 나의 첫 취향이 되었지. 하루, 이틀,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아직도 산호군락을 유영 중이야.     


“선배 취했어요? 무슨 헛소리예요. 아니 얼마나 됐다고 벌써 동문서답이세요.”

“어허, 이게 까분다. 술이란 게 말이야. 이런 거야. 마치 잠수를 하듯 푹 빠지는 거란 말이야. 아주 푹 빠진다고. 지금 보이지? 보여? 막 파도 지금 타는 거. 그리고 지금 여기 이 막걸리에 결국 푹하고 잠겨버렸단 말이지. ㅎㅎㅎ 너 어떡해야 술 잘 마시냐고 했지?”

“네 그랬는데, 선배 보니까 번지수가 한참 틀렸던 것 같네요.”

“너 인마, 잘 들어. 너는 소주 마시면 그 소주 맛이 쓰니?”

“윽 극혐”

“나는 인마, 음료수처럼 달기만 하다.”

"저 갈게요“

“야, 잠깐만, 야 알았다. 앉아봐. 선미야! 미안하다. N 분의 하자 고선 가면 어떡하니. 오빠가 지금 딱 말해줄게 어떡해야 술 잘 마시는지!”

“뭔데요”

“그건 말이다. 술에는 경험치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건 육체적인 게 아니라 정신적인 거야. 뭔 소리냐면. 니가 마시는 술에 사연이 쌓여야 한단 말이야.”

“나보다 고작 한 살 더 먹으신 분이 무슨 사연이 있을까?”

“너! 딱 들어봐”     


작년 신입생 환영회. 우리 역전의 용사들은 벌써 세 번째 거사를 준비 중이었어. 그때도 바로 이곳. 이 서촌이었단 말이야. 골목에는 술과 안주가 가득했지. 그 향기가 눈에 어른거릴 정도였어. 그리고 그 중 특히 톡 쏘는 향이 있었는데, 바로 이 막걸릿집이었어. 우리는 망설임 없이 바로 들어왔지. 맹렬했던 일정에 우리는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어. 하지만 여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다들 자긍심이 감돌았지. 말은 없었지만 우리는 알 수 있었어. 여기야말로 우리들의 승리와 영원한 우정을 맹세할 만한 곳이라고. 금세 성찬이 마련됐고 넓고 큰 성배에는 성수와 같은 막걸리를 가득 채웠지.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의식에 걸맞은 노래를 힘차게 불러가며 잔을 나눠 마셨어. 그리고 내 차례. 마지막 남은 막걸리를 벌컥대며 남김없이 비워내던 그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쳤던 거야.     

 

옆 테이블의 그녀. 나의 아프로디테. 그녀가 분명 나를 보고 웃었어. 심장은 쪼그라들고 땀이 나기 시작했어. 나는 한 번에 알 수 있었지. 우리는 운명으로 맺어졌다는 걸. 어쩌면 그녀는 처음부터 나를 보고 있었을지 몰라. 아니 사실은 그랬던 것 같아. 내 눈치를 봤던 거야. 미리 알았어야 했는데... 그녀는 수줍음이 많았어. 두 번 다시 내 쪽을 쳐다보진 않았지. 조심성이 많은 편이었나 봐. 나는 그래서 목소리를 크게 하고 술을 멋있게 먹으려고 노력했지. 그리고 그럴수록 나는 느낄 수 있었어. 그녀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우리 사이가 좁혀지고 있다는 걸.     

 

하지만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어. 그녀에 빠져 술을 들이켤수록 발목부터 천천히 바다가 차오르고 있었던 걸. 그리고 그녀에게 고백하려 일어나는 순간. 나는 가슴까지 차오른 바다를 실감하며 깊은 심연으로 빠지고 말았지. 나는 허우적댔어. 내 검과 방패, 그리고 갑옷까지 벗어던지며 수면을 향해 발버둥 쳤어. 다행히 내 동료 민혁이 나를 끌어올려줬지. 우리는 겨우 쓰러져가는 오디세우스의 배에 올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어. 앞은 이미 거대한 풍랑이 몰아치고 있었어. 포세이돈의 저주는 우리를 삼키려 했지. 나는 뜯어지는 갑판을 붙잡고 나의 아프로디테를 노래했어. 그리고 그때. 거대한 용오름과 함께 포세이돈이 등장한 거야. 한 손에는 무시무시한 창을 들고 거대한 말을 타고 있었어. 그리고 그 뒤로 내 이름을 울부짖는 그녀가 있었지.     


“나와 술로 대결해 이긴다면, 그녀를 보내주지”     


나는 거부할 수 없었어. 나는 결연히 일어나 포세이돈과 나란히 독한 넥타르를 나눠 마시기 시작했지. 안주도 없이 마셔댔어. 동료들의 응원과 함성. 하지만 신의 능력에는 한계가 없었고, 분하게도 나는 더 들이킬 수 없었어. 그러자 포세이돈은 크게 비웃으며 나를 다시 심연으로 떨어뜨렸지. 동시에 그녀의 절규도 들렸던 것 같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인천 앞바다에서 발견되었고, 주변에는 흩어진 새우깡과 빈 소주병뿐이었지.     


“인천은 또 뭐야? 진짜 다이나믹하다. 그러니까, 옆 테이블 여자한테 찝쩍대다 차여서 계속 술만 먹었고 결국엔 인사불성이 되셨나 보네요?”

“찝쩍이라니. 어휘 저렴하게. 진짜라니까. 내가 아주 조금 취하긴 했을 텐데, 서촌이 도깨비 자리라 그런 일이 생긴다고. 옛날부터 서촌에 사람 골려먹는 귀신같은 게 있다는 거야. 그래서 민수도 봤다니까, 포세이돈!”

“저 진짜 갈게요”

“야, 선미야. 어디 가니. 계산은! 카톡으로 줘. 오빠가 일단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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